[본문] 나하시(那覇)를 내려다보는 해발120m의 류큐왕국의 상징 유네스코 문화유산 슈리성(首里城) 나하시(那覇市)를 내려다보는 해발120m에 있는 류큐왕국의 상징 유네스코 문화유산 슈리성(首里城)
[본문] 오키나와(沖縄) 남부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인위령탑및 지금도 남북으로 나뉘어 추가되는 한국인 희생자명단 오키나와(沖縄) 남부 평화기념공원(平和祈念公園)에 있는 한국인위령탑및 남북으로 나뉘어 지금도 추가되는 한국인 희생자명단
[본문] 마지막에 자폭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오키나와(沖縄) 구 해군사령부참호(旧海軍司令部壕) 오타 미노루[ 大田實] 사령관외 전원이 옥쇄,자폭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구 해군사령부참호(旧海軍司令部壕)
[본문] 오키나와(沖縄) 각지에 남아있던 민가를 옮겨서 옛모습을 재현한 민속촌 류큐무라(琉球村) 오키나와(沖縄) 각지에 남아있던 민가를 옮겨서 옛모습을 재현한 민속촌 류큐무라(琉球村). 민가뿐만 아니라 사탕수수를 물소, 물레방아로로 즙을 만드는 공장등까지
[본문] 오키나와(沖縄) 첫날. 요카츠반도 해중도로, 헨자지마, 미야기지마, 이케이지마의 절경 해안 오키나와(沖縄) 첫날. 요카츠반도(与勝半島) 해중도로(海中道路),헨자지마(平安島), 미야기지마(宮城島),이케이지마(伊計島) 아름다운 해안
[본문] 오키나와(沖縄) 전통가옥 나카무라케(中村家) 주택 오키나와(沖縄) 전통가옥 나카무라케(中村家) 주택. 약 280년전에 지어진 부농민가의 건물로, 2차대전 전쟁피해를 피해서 류큐왕조(琉球王朝)시대의 민가구조를 완전하게 이해할수 있다.
[본문] MOB모임1 MOB
[본문] 팔순연 팔순연
[본문] 박강스페인가다(23일~25일) 박강스페인가다(23일~25일)2
[본문] 박강스페인가다(21일/22일) 박강스페인가다(21일/22일)
[본문] 박강스페인가다(19일/20일) 박강스페인가다(19일/20일)
[본문] 박강스페인가다(17일/18일) 박강스페인가다(17일/18일)
[본문] 박강스페인가다(7월 14일-16일) 박강스페인가다(7월 14일-16일)
[본문] 서영이졸업(중학교) 서영이졸업
[본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華城)과 닫혀있는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가 선왕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열한번째 여주 영녕릉 여주 영녕릉을 마지막으로 열한번째 에 걸친 조선왕조 왕릉 탐사를 마무리했다.
[본문] 17대 소현세자 대신에 등극한 봉림대군 효종(孝宗)과 인선왕후의 여주 영릉(寧陵)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옥체를 모셨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본문] 4대 세종(世宗)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주 영릉(英陵) 4대 세종(世宗)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주 영릉(英陵)은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열번째 단종의 짧은 삶의흔적 영월 장릉(莊陵) , 사약받은 관풍헌 그리고 유배지 청령포 조선왕릉 탐사 열번째 단종의 짧은 삶의흔적 영월 장릉, 사약받은 관풍헌 그리고 유배지 청령포
[본문] 17살의 짧은 삶.조선 왕조 6대 단종(端宗)의 영월 장릉(莊陵) 17살의 어린나이에 작은아버지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한 조선 왕조 6대 단종(端宗)의 영월 장릉(莊陵)
[본문] 조선왕릉 탐사 아홉번째. 4전5기만에 어렵게 찾아간 융건릉,용주사,팔달문 그리고 수원 화성행궁 조선왕릉 탐사 아홉번째. 4전5기만에 어렵게 찾아간 융건릉,용주사,팔달문 그리고 수원 화성행궁
[본문]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行宮) 수원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이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부의 관아를 옮겨짓고 행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793년(정조 17)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를 화성 행궁
[본문] 정조대왕의 효성이 묻어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 본사 화산(華山) 용주사(龍珠寺)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가 있었다. 고려 광종21년(970)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고 낙성식날 밤 정조가 꿈을 꾸니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이름을
[본문] 죽어서까지 아버지옆에 묻힌 효자 정조대왕의 융건릉(隆健陵)내 건릉(健陵)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후 순조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본문] 당파의 희생양이된 사도세자. 후에 추존되어 장조(莊祖), 한중록의 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융건릉(隆健陵)내 융릉(隆陵) 원래 휘경동 배봉산(拜峰山)에 조성되어 영우원(永佑園)이었으나, 지금의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장헌세자는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으며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였고, 장조로 추존되었다. 경의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세자가
[본문] 전동동창회 전동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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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월14일_피스퀸컵 개막전 6월14일_피스퀸컵 개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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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밤섬부군당 도당굿 밤섬부군당 도당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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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일본 육상자위대 오미야(大宮) 주둔지, 화학학교 창립일 공개행사 일본 육상자위대 오미야(大宮) 주둔지, 화학학교 창립51주년 기념공개행사. 비가와서 행사는 취소되고, 장비 일부분의 전시가 있었다.Military
[본문] 비오는 아카데미하우스 비오는 아카데미하우스
[본문] 못깊은집 못깊은집
[본문] 일년에 한번밖에 없는 요코스카(横須賀) 군항(軍港) 순례(해상자위대기지, 미해군기지) 키티호크는 작전으로 나가서 없었지만, 해상자위대의 전함들을 많이 볼수가 있었다.
[본문] 홍대앞에서 홍대앞에서
[본문] 제주도-돌아오는날 제주도-돌아오는날
[본문] 제주도-나머지둘째날 제주도-나머지둘째날
[본문] 종영이형 아들 결혼식과 5월의 한가한 토요일 오후 그리고 3년후그 동생의 결혼 종영이형 아들 결혼식과 한가한 어버이날을 미리 같이 식사한 토요일 오후
[본문] 조선왕조 왕릉 탐사 마무리(릉원묘 분포도및 조선왕조 릉/원/묘 링크 앨범) 조선왕조 왕릉 탐사 1,2차를 마무리 하면서, 촬영한 앨범을 연대순으로 링크했다. 24대 왕릉과, 왕후릉,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3명의 왕릉등 총 63군데의 조선왕조 릉원묘을 전체 촬영을 마치고, 정리했다.
[본문] 둘째날-월정리 둘째날-월정리
[본문] 제주도첫날 제주도로
[본문] 조선왕릉 탐사 일차 마지막, 서삼릉내의 비공개 회묘, 효릉, 후궁묘, 왕실 태실, 서오릉내 온릉과 파주삼릉내 공순영릉 그리고 김포 장릉(章陵) 조선왕릉 탐사 일차 마지막, 서삼릉내의 비공개 회묘, 효릉, 후궁묘, 왕실 태실, 서오릉내 온릉과 파주삼릉내 공순영릉 그리고 김포 장릉(章陵) 조선왕릉 탐사 일차 탐사를 마무리 했다. 총 8번에 걸쳐서43개의 릉/원/묘를 2700여장, 6.5기가의 데이타를 구성했다. 지금부터는 정리를..
[본문]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의 친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김포 장릉(章陵)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정원군은 처음엔 양주군 곡촌리에 묻혔다.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그후 인조는 정원군묘를 김포현의 성산 언덕으로 천
[본문]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출된, 인왕산 치마바위의 주인공인 중종원비 단경왕후신씨 온릉(溫陵) 연산군에게 여동생을 시집보내 영의정이 된 신수근.중종이 왕자시절 딸을 시집왕자비로 시집보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참살되고, 중종비가된 딸이 7일만에 페비가된 애처러운 사연.폐비가 된후 인완산에 치마를 걸어서 중종을 연모했었다.
[본문] 영조의 요절한 장자이면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아버지가 된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파주삼릉(공순영릉(恭順永陵))내 영릉(永陵) 진종은 7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3년후 숨을 거두자 시호를 효장(孝章)이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뒤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왕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했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장세자는 양부(養父)로서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그 후 1908년 황제로 추존, 진종소황제가 되었다.
[본문] 한명회의 넷째 딸로 언니의 릉의 옆에 있는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파주삼릉(공순영릉(恭順永陵))내 순릉(順陵)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과 마주보고 있는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산군에게 출가했다. 효심이 깊은 예종은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세에 불과했고, 15세인 월산군은 병약하여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본문] 17세에 승하한 한명회의 셋째딸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의 파주삼릉(공순영릉(恭順永陵))내 공릉(恭陵) 세조때 한명회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병약한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그의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다음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승하했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시아버지인 세조에게 사랑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
[본문] 8개월의 조선 최단재임이면서 효자였던 조선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서삼릉내 비공개 효릉(孝陵)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것과 죽은 뒤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묻어주고 장사를 소박하게 치를 것을 유교로 남기고 보령 3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인종은 유교대로 어머니 장경왕후(희릉) 옆 언덕에 안장되었고, 인종의 효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호를 ‘효릉’이라 했다. 인성왕후도 후일 인종 왼쪽에 비
[본문] 일제시대, 해방후 도시화로 한곳으로 모인 서삼릉내 후궁묘, 왕자/공주의 묘 그리고 조선 왕실 태실 본래왕릉영역 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묘를 쓰지못하도록되어있으나, 일제시대및 해방후 도시화에 따른 개발과정에서 전국각지의 명산에 있는 후궁들의 묘, 왕자와 공주들의 묘, 그리고 조선왕조 왕실의 태실이 한곳에 모여있는 45묘, 태실54기가 들어있는 왕실의 집장묘. 1. 유명 조선국 증경빈 이씨 2. 조선국 귀인 경주김씨 지묘 3. 귀인 평양조씨 지묘 4
[본문]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비공개 회묘(회릉/懷陵,懷墓)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의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은 묘비조차 없던 윤씨의 묘에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했다.성종이 승하하고 그 국장기간에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묘호를 회묘에서 회릉으로 고쳤다.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
[본문] 조선왕릉 탐사 일곱번째. 연산군묘와 선정릉 조선왕릉 탐사 일곱번째. 광해군묘에 다녀오면서 오랫만에 예전에 살던 상계동과 몇년전에 있던 선정릉 바로앞의 사무실등등.
[본문] 왕비 3명의 능이 모두 별도로 있는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선정릉내 정릉(靖陵) 원래는 고양(高陽)에 예장하고 묘호를 중종, 능호를 희릉(禧陵)으로 했다가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 오른쪽 언덕에 정릉을 조영했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선릉 동쪽의 언덕인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겨졌다.조성 당시부터 낮은 지세로 문제가 된 정릉은 조성 이후로도 숱한 침수를 겪었다.
[본문] 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선정릉내 선릉(宣陵) 조선 9대 성종(成宗, 1457~94)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의 능이다. 성종은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의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명으로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 초기의 문화를 꽃피웠다.정
[본문] 딸,사위, 폐비 거창군부인 신씨,후궁 조씨와 같이 있는 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의 사위인 능성구씨의 선산에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묘역 아래쪽에는 후궁인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및 연산군(燕山君)사위 구문경묘(具文景墓)와 연산군(燕山君)딸의 묘가 있다.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여섯번째. 태강릉의 태릉,강릉 그리고 6.25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광릉 태강릉중에서 강릉은 비공개릉이었다. 예산등의 문제로 공개를 하지못하는데, 촬영을 할수없을뻔했으나, 태강릉 관리소장님의 배려로 소중환 촬영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본문] 힘들게 찍은 비공개릉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심씨의 태강릉내 강릉(康陵)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12세 나이로 왕위에 올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인순왕후가 낳은 순회세자가 죽은 지 2년 만에 의지했던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숨지자 명종은 마음의 병을 얻었다. 선정을 베풀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명종은 보령 34세로 승하했다.명종 승하한 후 인순왕후는 덕흥대원군(중종의 일곱째 아들)의
[본문] 8년간 수렴청정을한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태강릉내 태릉(泰陵) 문정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 명종을 비롯해 1남 4녀를 두었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을 내세워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또 당대의 고승 보우(普雨)를 앞세워 불교 부흥을 도모했다. 6.25때 멸실된 것을 1994년 복원하였다.
[본문] 6.25때 기총소사에 박살난 무인석의 석마가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光陵) 조선 7대 세조(世祖, 1417~68)와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83)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동식물의 낙원이자 천연의 자연 박물관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던 세조는 1452년 단종 즉위 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권력을
[본문]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서오릉과 서삼릉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일산에 있는 서오릉과 서삼릉을 찾았다.서오릉의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서삼릉의 희릉, 예릉을 볼수있었다.또 서삼릉에서 관리하는 몇군데는 축협의 초지안에 릉이 있어서 볼수가없었다.
[본문] 사도세자 큰아들 의소세자의 서삼릉내 의령원(懿寧園)과 효창공원에서 옮겨온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의령원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큰아들 의소세손의 원이다. 태어난 다음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 추계예술대학, 중앙여고 자리)에 묻혔다가 1949년 이곳으로 이장. 효창원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원이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에 장사지내 효창묘라 했다가 효창원으로 바
[본문] 조선 11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서삼릉내 희릉(禧陵) 처음에는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희릉 천릉사건,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하여 중종 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중종의 유교에 따라 중종의 정릉을 희릉 옆에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릉과 왕비릉 중간으로 옮겨 세우고, 왕의 능호를 사용했다. 그후 문정왕후의 주장에 의해
[본문] 강화도령 조선 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의 서삼릉내 예릉(睿陵)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철종의 삶과는 달리,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철종의 능을 매우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미게 된다. 이는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꿈꾸던 대원군의 뜻이기도 하였다. 부덕이 높은 여인이었던 철인왕후는 1878년(고종 15)에 승하 후 철종 곁에 안장되었다 .
[본문] 숙종의 빈에서 왕비로, 다시 빈이 된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의 서오릉내 대빈묘(大嬪墓) 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왕자 윤(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본문] 13년밖에 살지못한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와 빈 공회빈윤씨 서오릉내 순창원(順昌園) 조선 13대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그의 빈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능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한 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본문]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나, 한쪽이 비어있는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서오릉내 홍릉(弘陵) 영조는 정성왕후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능 오른쪽(바라보아 왼쪽)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 쌍릉으로 예상하여 배치해놓았으나 영조 승하 후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으므로 홍릉은 이처럼 한 쪽에 빈 채로 남아 있다. 영조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정해놓았던 자리는 비어 있고(우허제右虛制) 그 앞으로 석물이 놓
[본문] 서오릉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80)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승하했다. 슬하에 공주 셋을 낳았으나 명선·명혜·명안공주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본문] 조선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서오릉내 명릉(明陵)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서오릉 안에 있는 익릉에 따로 안장되어 있고, 숙종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씨의 무고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나 숙종 26년 원인 모를 병으로 승하했다. 제2계비 인원왕후는 1702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 승하했다
[본문] 요절한 의경세자 대신 즉위한 조선 8대 임금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서오릉내 창릉(昌陵)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짧은 재위기간(14개월) .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
[본문]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서오릉내 경릉(敬陵)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한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
[본문]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 영빈(暎嬪) 이씨의 서오릉내 수경원(綏慶園)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暎嬪) 이씨의 능.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영빈에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와 사도세자를 낳았다. 그후사도세자가 폐위당하고 죽음을 맞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69세로 승하하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지냈다. 처음에 지금의 연세대학교 안 수경원
[본문] 대학동기들 청계산 등반과 청계산 특전사 충혼비 동기들과 같이 청계산등산이 있었다. 끝난 다음에 시원한 막걸리까지..
[본문]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정릉, 홍릉길의 영휘원과 숭인원, 구 중앙정보부 내부에 있던 의릉, 조선왕계도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그리고 영친왕의 아들의 이진의 묘 숭인원,그리고 구 중앙정보부내부에 있던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를 찾았다.
[본문]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 황태자비의 아들 이진(晉)의 숭인원(崇仁園)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22)의 묘이다. 영친왕은 형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원래 약혼녀가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하고, 1920년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는 일본의 노력에고 불구하고 1921년 아들 진을 얻었으
[본문]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귀비 엄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5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궁 밖으로 내쫓겼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환궁하였다.황귀비는 생전에 서구식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양정의숙,진명여학교설립, 숙명여학교에 많은 기부
[본문] 구 중앙정보부가 망가트린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 오랫동안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며 정자각 앞에 연못을 파고 각종 정원수를 심어 변형시켜놓았던 것을 문화재청이 10년에 걸쳐 복구하여 지금의 모습을 되찾은 조선 20대 경종(景宗, 1688~1724)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30) 어씨의 능.
[본문] 태조 이성계에게 버들잎 떠있는 물바가지를 건넨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壽陵)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조선 왕릉 첫 능호인 정릉에서 오늘날 중구 정동이 유래되었다. 태조에 이어 즉위한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고,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본문] 조선왕릉 탐사 세번째. 세곡동 안기부옆의 헌인릉(獻仁陵) 헌릉(獻陵)은 조선 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며, 이 능을 바라보아 왼쪽에 있는 인릉(仁陵)은 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이 헌릉과 인릉을 합쳐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본문] 조선 23대 순조(純祖)와 비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헌인릉내 인릉(仁陵) 조선 23대 순조(純祖, 1790~1834)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본문]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인릉내 헌릉(獻陵)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태종이 왕권을 잡은 뒤
[본문] 조선왕릉 탐사 두번째. 조선의 마지막 황제 홍유릉(洪裕陵)과 안타까운 사연의 사릉, 광해군묘 조선의비운의 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이 있는 호유릉(洪裕陵), 안타까운 단종 비의 사릉, 불운의 왕제 광해군묘와 그의 어머니 성묘.
[본문] 태왕사신기의 촬영지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의 고구려 대장간마을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지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의 고구려 대장간마을이 새로운 4월25일 재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중이었다.
[본문]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서울로 돌아오기위해 워커힐쪽으로 오는 아차산기슭에서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본문] 죽어서 어머니 발치에 묻힌 15대 폐위군주 광해군묘와 공빈(恭嬪)김씨의 성묘(송릉/松陵,成墓) 불운의 왕제로서 죽은후에 어머니 발치에 묻히길바랬던 15대 폐위군주 광해군묘와 공빈(恭嬪)김씨의 성묘(송릉/松陵,成墓)
[본문] 한많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 영월에서 가엾게 죽어간 단종을 기리는 한많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
[본문]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삼합장릉인 홍유릉내 유릉(裕陵) 조선 마지막 능으로 27대 순종황제(純宗皇帝, 1874~1926)와 원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삼합장릉이다.
[본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유릉내 홍릉(洪陵) 비운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유릉의 홍릉(洪陵)
[본문] 조선왕릉 탐사 첫날 동구릉(東九陵) 조선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이 마련돼 있는 곳으로 동구릉은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1408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묏자리를 물색하여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본문] 조선 5대 임금 문종의 동원이강릉 형식인 동구릉내 현릉(顯陵) 현릉(顯陵).조선 5대 문종(文宗, 1414~5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41) 권씨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1450년 왕위에 올라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하고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보령 39세로 승하하였다. 문종의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부
[본문] 추존왕 익종(翼宗) 효명세자(문조)와 조선후기의 역사를 움직인 조대비 신정황후의 동구릉내 수릉(綏陵) 수릉(綏陵).추존 황제 문조(文祖, 1809~30)와 신정황후(神貞皇后, 1808~90) 조씨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세자 시절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며, 모든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했다.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1846년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양주 용마산 아래로 옮겼
[본문] 조선왕조 20대 경종의 윈비 단의왕후의 동구릉내 혜릉(惠陵) 혜릉(惠陵).조선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심씨 능이다. 단의왕후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춰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숙종 44년 승하하여 숭릉 왼쪽 산줄기에 모셔졌다가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에 추봉되었다.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게 자리하고
[본문] 조선 14대 선조대왕,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3개인 동원이강릉인 동구릉내 목릉(穆陵) 목릉(穆陵).조선 14대 선조(宣祖, 1552~1608)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 1600) 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이 보이는데, 동원이강의 형식의 변형이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본문] 조선왕조 18대 현종왕릉인 동구릉내 숭릉(崇陵) 조선 18대 현종(顯宗, 1641~74)과 원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83) 김씨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봉림대군(효종)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1659년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본문] 조선왕조 21대 영조대왕과 정순왕후 김씨의 동구릉내 원릉(元陵) 원릉(元陵)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1805) 김씨의 능이다.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52년) 왕으로,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붕당정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본문] 조선왕조 태조이성계의 동구릉내 건원릉(健元陵) 건원릉(建元陵)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이다.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태조는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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