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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4px"> 설마리 전투역사. 아래 설마리 전투역사제목에 마우스를 올리시면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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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4px"> <table width=900> <tr><td> ‘설마리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서울을 함락하기 위해 펼쳤던 1차 춘계 공세를 맞아 연합군이 임진강 전선(캔사스 전선)을 방어하려고 치렀던 ‘임진강 전투’ 중 하나이지만, 설마리 전투=임진강 전투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역사에 기록될 치열한 전투였다. 설마리 전투에 투입된 영국군 29보병여단 1대대(글로스타셔 대대)는 당시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중성산(캐슬 고지)부터 봉암리까지 약 11km에 걸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임진강 전투가 일어난 작전지역은 문산-적성- 도감포이며 옛부터 서울을 들어오는 관문으로 역사 이래 전쟁터가 되기 일쑤였던 곳이다. 임진강은 유속이 빨라 도강하기가 쉽지 않다. 얕은 여울목이나 나루터를 제외하고는 건너오기 쉽지 않아 방어에 유리한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임진강 주변 파평산, 감악산, 중성산에 진지를 설치하면 임진강 전선을 쉽게 관측하고 방어할 수 있는 주요 전략지일 수밖에 없다. 1951년 1.4후퇴를 맞아 서울을 빼앗겼던 연합군은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했다. 미1군단은 김포반도에 해병 제5독립대대, 임진강 남쪽에 한국군 1사단, 마지리와 도감포에 영국군 제29여단을 배치해 임진강 하구부터 문산-전곡-화천저수지에 이르는 서부전선 방어망을 구축했다. 영 제29여단은 A, B, C, D 4개 중대로 나뉘어 중성산, 감악산 등 4개 고지에 배치하고 있었으나 방어 면적이 넓어 적의 공격이나 전투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위장하고 잠복 중인 중공군을 보았다는 마을 사람의 제보가 있던 운명의 4월 22일 밤, 보름달이 임진강변을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당시 영국군은 다음날 ‘성 조오지의 날’ 전야제라 칠면조 만찬과 모자에 달, 장미꽃 등 축제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10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중공군이 임진강 전투에 투입한 군대는 중국군 제19병단 8만 7천명과 북한군 제1군단 1만 7천명이었다. 중국군 64군사단 제19병단 첫 공격의 대상은 중성산 고지였고 첫 교전은 중공군 60여 명을 사살하고 별 피해 없이 끝났다. 그러나 뒤이어 허리까지 차오르는 임진강을 건너 온 중공군의 공세에 밤새 치열한 교전이 시작됐다. 6시간의 혈투 끝에 영국군 장교와 장병이 죽고 글로스타셔 대대는 감악산 북서쪽 설마치로 철수했으며 중성산(캐슬 고지)은 빼앗겼다. 이로부터 25일까지 글로스타셔 대대는 설마리에 고립되어 설마리 253고지를 사수하며 끝없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완강히 대항해야 했다. 글로스타셔 부대원이었던 한 장병의 회고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선 설마리 전투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 전투는 병기도 기술도 전략도 아무 소용없는 소모전이었다. 끝없이 격퇴했지만 적의 병력은 계속 늘었고 오히려 더 많이 보충되어 공격해왔다.” 고립된 글로스타셔 대대를 구출하려는 작전도 실패로 끝나자 여단장은 대대장에게 철수를 하던지 투항을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에도 글로스타셔 대대가 있는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자 적성-설마리-동두천으로 공격하려는 그들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5일 새벽 총공격에 나선 중공군의 공세가 지나간 후, 글로스타셔 대대는 철수준비를 한다. 오전 10경이었다. 군목, 군의, 부상자 50여 명은 고지에 남았고 A중대를 비롯한 주력부대는 남쪽으로, D중대는 북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주력부대와 잔류했던 부대원은 포로로 잡혔고 D부대만 탈출에 성공했다. 글로스타셔 대대 652명 중 겨우 67명만이 설마리 253고지에서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사흘간의 이 전투에서 59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3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31명이 사망했다. 이날 여단의 주력부대도 철수과정에서 전차에 200여 명의 부상자를 탑승해 포탑을 회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후퇴하면서 부상자들이 희생당하는 아비규환을 이뤘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 제29여단은 전 병력의 1/3을 잃었으며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이 겪었던 가장 치열한 전투이자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기록됐다. 이 설마리 전투로 중공군은 1차 춘계 공세에 실패했다. 서울을 다시 점령해서 모택동에게 노동절 선물로 서울을 바치겠다는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의 호언장담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사흘동안 불철주야 공격을 퍼부었으나 적군의 완강한 방어 때문에 의정부를 우회해 유엔군 퇴로를 끊는데 실패했다’고 보고하고 작전중지 승낙을 받았다. 또 설마리 전투에 투입됐던 중국군 제19병단장 양득지는 계획된 시간 안에 공격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엄중한 비판을 받았고 64군 사단장과 정치의원들이 강등 당하는 문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