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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저널7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걸 바꾸는 건 나다. 그러니 무리가 따른다. 가령 “제가 여러 번 여러분들에게 가려고 했던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었다고 치자(1:13). 실제로 어떤 신자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여러 번 자신을 찾아오려 했지만 좌절하셨구나 하는 “말씀”을 읽어내고 자신의 완고함을 회개한다. 물론 이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초청을 여러 번 거절한 체험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그는 이 구절이 자신의 고집을 꾸짖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적용은 본문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친구의 방문을 앞둔 사람은 또 자기 입장에서 이 구절을 갖다붙일 수 있을 것이고, 몇 차례 어학 연구를 시도했던 대학생은 또 자신의 문맥에서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분이 나를 스페인으로 보내 주면 좋겠다”(15:24)는 대목에 오면,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후원을 부탁한 것처럼 나도 어학연수 보내줄 누군가를 찾으라는 말씀이라고 “적용”할 지도 모른다. 물론 이쯤 되면 우리의 읽기는 “꿈보다 해몽”의 영역 으로 넘어간다. 본문을 존중하는 읽기 물론 이 해몽은 전적으로 내 맘이다. 구체적인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본문 자체가 아니라 나의 창조적 혹은 이기적 상상력인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어차피 본문의 본래적, 혹은 역사적 의미가 무의 미한 상황이니 그냥 내가 그럴듯하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재료로 삼긴 했지만, 실제 조리되어 나온 음식은 나 자신의 생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해석학적 우상숭배라 부른다.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불렀던 이스라엘처럼, 내 생각의 송아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착각하는 행태다. 성경을 빙자했다는 사실 말고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말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을 내 생각이 투영되는 거울로 삼고, 본문의 이름으로 나 자신의 생각을 “발견”한 것뿐이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든,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묵상이든, 오늘날 교회의 성경읽기는 많은 부분 이런 해석학적 우상숭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은혜”받는데 익숙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식의 자의적 해석과 자기도취적 감동이 초월적 은총일 가능성은 적다. 진정으로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초월의 음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성경은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면서도 우리 삶이, 혹은 우리 교회가 이토록 무력한 것이 어쩌면 이런 자기중심적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은 아 닐까? 성경의 본문을 대하기 전, 우리는 먼저 성경이 내 통제와 조작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남의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를 위한 말씀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말씀을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는 없다. 나 아닌 남의 말, 내 생각 아닌 타인의 생각을 담은 글이기에, 여기에는 겸허하고 신중한 듣기가 필요하다. 무엇을 적용할까를 묻기 이전, 지금 읽는 본문의 본래 의미가 무엇일까를 묻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우리 인간들에게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지만, 우리의 노력은 들려지는 말씀을 정확하게 들으려는 것이어야지, 대충 듣고 내 맘대로 상상하는 그런 부지런함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재료로 삼 긴 했지만, 실제 조리되어 나온 음식은 나 자신의 생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해석학적 우상숭배 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