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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큐티, 신앙의 초보인가 기본인가? Q.T 저널 8 우리는 성경에서 나를 위한 말씀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말씀을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는 없다. 적용강박증과 성숙한 신앙 많은 경우 우리가 본문의 의도를 벗어난 자의적 해석과 적용에 빠지는 것은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안고 있는 적용강박증과 관련이 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만 하고, 내 하루와 관련된 구체적인 적용거리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과 나의 적용거리를 나누어야 할 경우는 이런 강박증이 더 실제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가 본문 자체의 의도를 경청하지 못하게 만들 만큼 조급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의 적용보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기 때문 이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찾겠다는 것은 오늘도 말씀의 빛 아래서 내 하루를 살고 싶다는 건강한 태도의 표현이다. 하지만 때로 우리의 이런 열성이 소아병적 증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특히 이런 현상은 우리가 큐티를 할 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원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새로운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우리는 굳이 성경을 열지 않아도 뻔한 상황에서조차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물론 부모님의 뜻을 잘 헤아려 모시겠다는 자식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겠다는 태도가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말씀의 인도라는 것이 매 순간순간 말씀이 적힌 “책”을 열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의중을 헤아리는 것이 시시각각 부모님께 여쭈어보는 것과 다른 것처 럼 말이다. 비교적 단순한 사건을 맡고서도 법률 서적을 뒤적여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변호사를 볼 때나, 비교적 단순한 증세를 검진하면서도 의학서적을 계속 뒤적여야 하는 의사를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우리가 생각하는 명의란, 오랜 진료 경험이 그 속에 있어 웬만한 증상들은 책 없이도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삶의 성숙함, 아니 신앙의 성숙함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매사에 성경을 펴고 지시를 받아야 하는 영성은 좋은 신앙의 표지라기보다는 아직도 “짠밥이 모자라” 늘 고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영적 이등병들의 모습, 아직 세견이 없어 늘 엄마에게 물어 야 하는 다섯 살짜리의 삶에 가깝다. 성숙을 위한 말씀 읽기 물론 하나님이 다섯 살 식 대화를 원하신다면 그런 방식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방식은 그렇게 단도직입적이지 않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두신 “족집게 예언”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적어 둔 글들의 모음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그 글에 얽힌 저자들과 독자들의 문화상과 세계관, 그리고 그 글이 쓰여져야 했던 특수한 상황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한, 다른 사람을 위한, 다른 사람의 말을 하나님에 의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며 읽는다. 애초에 다른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 될 때, 그 대화가 단도직입적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남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내 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