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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4px">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br>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