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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4px"> 정보 출처는..<a href=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9v5VxmcEXxXwWNE3OVDAE/xnsKPLFX9D&qb=uczEq7vnIMD8x9Q= target=_blank>이순신 장군의 일본인 수제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a>을 보시길.. 제독의 얼굴에 마우스를 올리면, 간단 소개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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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4px"> <br> 출생년도 1848년. 사망년도 1934년. 출생지 일본국 가고시마현의 "가노야"라는 작은 마을. 무려 13세기(한국에서는 고려시대로서 최충헌이 드디어 요즈음 "무인시대"에서 보여주는 상갓집 개 노릇 때려치우고 정권을 잡은 뒤, 그 가문이 권력의 단맛에 취하여 있다가 몽골과의 전쟁을 하게 되었던 시기)부터 무사가문이었던 도조 가문에서 태어난 헤이하치로는 이미 8살 때부터 집 근처 논 사이를 흐르던 작은 개울에서 일본도로 잉어 50마리를 "베어서" 잡았다는 일화를 남겼을 정도로 무예의 달인이었다. 게다가, 재치가 뛰어나면서 고집이 세서 (당시 한중일 청소년들 답지 않게) 웃어른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는 "문제아"이기도 하였다. 그는 12살이 되었던 해에 매월 벼 한말을 받기로 하고서 친척이 운영하는 사무소의 서기가 되었으나, "문제아"였던 그가 평생 남의 말이나 받아쓰고 살아가는 "서기"로서 "평범하게" 살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오늘날 규슈 남부의 "사쓰마"라는 지역의 다이묘로 있었던 자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의 어느 날, 그 다이묘의 아버지의 행렬이 요코하마에서 에도(도쿄)로 가던 길에 (당시 미국 때문에 개항한 일본과 무역을 하러 들어왔던 듯한) 4명의 영국인과 시비를 벌이게 되었고, 그 결과 다이묘의 아버지의 수행원으로 있었던 무사들이 영국인들 중 한명을 베고 다른 두명을 부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즉각 영국정부는 사쓰마번의 다이묘에게 이에 대해서 배상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 사쓰마번 앞바다인 가고시마만을 향하여 군함 7척을 출동시켜 사쓰마번의 다이묘가 보유한 "당시의 일본군치고 꽤 근대화되어진 군대"를 순식간에 박살내었다. 그러한 사태를 목격한 젊은 사무라이(당시 24세였다. 하지만, 당시의 연령 기준을 오늘날의 연령 기준에 대입한다면 아무래도 34살 정도로 계산하는 것이 좋을 듯) 도고 헤이하치로는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 일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미 한번 싸운 적국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 최강의 해군국이었던 영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고, 당시 제대로 된 ESL(English Second Language)과정도 없었던 상황 속에서, 영국의 교회를 다니면서 성가책과 성경책을 교재삼아 영어를 배운 뒤, 그것을 바탕으로 해군관련 교육들을 모두 완벽하게 마스터 한 다음, 그에 대해서 알게 된 일본 정부 관리들의 지시로 당시 영국의 조선소에 큰 돈을 주고 발주하였던 신식전함의 건조과정을 살펴본 뒤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1894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 참가하여 대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고 (이 때 일본이 획득한 최초의 일본 밖 영토였던 대만은 이후 1945년에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그 뒤 국민당 군대가 들어올 때까지 일본의 영토로 남게 된다.), 그 뒤 1904년 2월 8일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