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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4px"><td align=left><b>박유굉(朴裕宏) 본관 : 반남(潘南) 1867(고종 4)∼1888(고종 25)</b> <br> <br><font size=3> 1882년 여름 조선정부에서는 임오군란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일본에 박영효(朴泳孝)를 수반으로 하는 수신사를 파견하였는데, 그는 이때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으며, 수신사일행이 귀국한 뒤 일본에 잔류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br> 1882년 12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수학하였다.<br> 1883년초 군사학을 배우고자 일본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86년 일본육군사관학교 보병학과에 들어가 사관생도가 되었다. <br> 그러나 개화파에 의하여 선발, 파견된 유학생들이 1884년 갑신정변에 행동대원으로 참여한 탓으로 이후 조선정부에서 일본유학이 금지됨은 물론, 재일유학생들에 대한 학자금 중단과 귀국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br> 동료유학생들이 귀국하여 처형당한 소식과 아버지의 구금소식 등을 전해 듣고, 국내에 돌아가면 중형에 처해져 영어(囹圄)의 몸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 1888년 5월 27일 아침, 기숙사에서 권총으로 인후부를 쏘아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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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align=left><font size=3> 그의 자결은 일본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의 유력지인 《지지신보 時事新報》·《도쿄니치니치신문 東京日日新聞》·《요미우리신문 讀賣新聞》·《유빈호치신문 郵便報知新聞》·《마이니치신문 每日新聞》, 심지어 《오사카아사히 신문 大阪朝日新聞》에까지 그의 자결기사가 크게 실렸다.<br> 이러한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그의 자결이유는 위와 같은 개인적인 면 이외에 국세의 만회를 목적한 구국적인 측면도 있었음이 지적되 고 있다.<br> 즉, 조선의 국세퇴락을 한탄하면서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비통해하며 자결을 결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구국의지는 후배 유학생들로 하여금 1900년 4월 그의 비석을 세우면서<font color=red> ‘타루비(墮淚碑)’</font>라는 글을 새겨넣게 하였다.<br> 김택영(金澤榮)은 1893년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묘를 참배하고 〈일본육군성사관학교유학생 박유굉묘갈명 日本陸軍省士官學校留學生朴裕宏墓碣銘〉을 작성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묘는 일본 동경(東京)의 아오야마(靑山)묘지의 외국인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묘 옆에 있다. <br><br> 참고문헌 金澤榮全集, 悲劇의 軍人들(李基東, 一潮閣, 1982)<br> 朝鮮末 渡日留學敎育의 實態와 硏究動向(金祥起, 湖西史學 19·20合輯, 湖西 史學會, 1992). 〈尹炳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