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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주벌의 별이 되어 경학사, 신흥강습소 창설(1911년 4월) 유적지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 항일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라 신민회 총감독 양기탁, 신민회원 안창호, 김동삼, 신채호, 이승훈(위) 이시영, 이회영, 이동휘, 김구, 조성환(아래)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으로 결의하고, 국 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다.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은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 다는 신민(新民) 정신은 우리민족 스스로 새로워지자는 의지를 담고 있으며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다. 신민회는 무엇을 위하여 일어남이뇨? 민습(民習)의 완고와 부패에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매에 신교육이 시급하며, 원기의 쇠퇴에 신수양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신윤리가 시급하며, 문화의 쇠퇴에 신학술이 시급하며, 실업의 초췌에 신모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부패에 신개혁이 시급이라. - 신민회 취지서 중에서 - 신민회 조직은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을 양기탁이 맡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를 전덕기, 집행원 을 안창호가 담당하였으며,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창건위원들은 신민회 창립 후 즉각 자기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는 인사들을 가입시켰으므로, 회원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910년 경에는 약 800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 한 것으로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단체로 성장하였다. 1910년 3월, 신민 회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서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창건을 본격적 으로 시작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2월에 전국간부회의를 열어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유하현 삼원포로 확정하고, 대일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