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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 전투┃89 ▶ 한 · 중 항일연합군을 조직하다. 1931년 11월 2일, 한국독립당은 다시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일본 관동군의 만주점령에 대처하여 새로 운 활동목표를 설정하고, 모든 역량을 항일독립전쟁에 집중하기로 결의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10일, 독립군 각 군부대의 지휘부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당과 군의 대표 신 숙과 남대관 등을 중국의 길림자위군, 호로군연합군 총본부에 파견하여 사령관 정초와 각 부대 군장들과 한중연합작전을 협의하도록 하였다. 1931년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최악, 오광선, 심만호, 최관용 등 부대장들이 중국 군 지휘부와 협의하여 상호연합과 군사지원협정을 체결하였다. ▶ 한국독립군의 고난과 시련 한국독립군은 총동원령에 의하여 소집된 병사들의 훈련과 부대편성을 서두르던 중인 1932년 2월 12일에 일본군과 만주 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국독립군 병력의 부대배치가 완 전히 정비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전투장비 지급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 공격을 당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1932년 2월 5일 하얼빈 방면에서 만주 항일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중동철도를 따라 진공하고 있었다. 한중연합 군은 위사하. 오상현 일면파, 오길밀, 의란현 등지에서 일만군 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중무장한 일본군에 맞 설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 했다. 한 국독립군의 연이은 참패는 군장비 열세, 군자금 부족, 보급품 부족의 결과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아픔은 뼛속까지 사무쳐 오는데 탄 약이 떨어져 적을 앞에 놓고도 후퇴해야 하는 분노와 슬픔은 독립군 장병들의 가슴을 깊게 파고 들었다. 한국독립군 전투 점령지(흑룡강성 하얼빈 아성현) 한국독립군 전투회의 유적지 (흑룡강성 오상현 사하자촌) 한국독립군 전적지(흑룡강성 오상현 장광재령과 통하현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