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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일본군 유인작전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의 교묘한 유인작전 은 분대원 소수의 인원으로 총격전을 벌이면 서 일본군을 매복지점까지 유도하였다. 일본 군이 독립군 잠복지점까지 추격해왔을 때 독 립군은 고려령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 어 십여 명을 사살하였다. 일본군 후속부대들은 비파동이나 해란강과 두만강 합수목에서 두만강을 건너 계속 봉오동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일광산에서 숙영하던 아라요시 부대도 안산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야하를 건너 후안산 부근 에서 야스카와 부대와 합류하였다. 일본군 연합부대는 다음날 봉오동으로 진군하여 북로독군부 본부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 일본군, 독안에 든 쥐로 만들라. 일본군이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 오는 상황을 보고받은 홍범도와 최진동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섬멸 하기로 결정하고, 먼저 마을 주민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명령을 내린 후 작전회의에 돌입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홍범도는 부대를 나누어 제1중대장 이천오에게 중대원을 이끌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매복하게 했으며, 제2중대장 강성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 중 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 북단에 매복하였으며, 군무국장 이원에게는 본부 병력 및 잔여중 대 를 인솔하고 탄약 등을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 퇴로를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홍범도는 제2중대 제 3소대장 이화일에게 약간의 병력으로 고려령 북쪽 고지와 마을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 전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 오도록 명령하였다. 홍범도는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에 매복한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면 일시에 공격하 여 적을 격퇴하는 작전을 결정하고 부대에 하달하였다. ▶ 독립전쟁의 횃불을 들고 북간도에 서다. 봉오동은 최진동 형제가 1910년대 간도 이주민들과 함께 세운 마을로 하촌, 중촌, 상촌으로 나뉘어 있 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과 투쟁의지가 월등하게 높은 지역이었다.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양계, 가축농장, 두부공장 등이 건설된 신흥부락이다. 봉오동은 길고 좁은 골짜기 가 이어진 계곡에 동서로 고려 령(高麗嶺)과 초모정자산 줄기 가 뻗어 있고, 상촌은 거의 삼 면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군사요새로써 천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령에서 바라본 봉오동 일대. 토성촌과 봉오동 저수지 입구 봉오동 입구(수남촌) 고려령 기슭의 흥진촌(고려둔), 일본군 추격대가 넘어온 곳으로 현재도 조선족이 사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