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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온 젊은이들 1919년에는 3·1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 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 나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 시설만으로는 학생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인 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현 고 산자(孤山子)부근의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의 학교 를 분교로 삼았다.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대한군정부가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 는 몇 차례에 걸쳐 김훈, 백종렬 등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북로군정서에 파견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북로군정서의 핵심 지휘관이나 대한독립군의 일원으로 합류하여 청산리전쟁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전투를 치르며 항일독립전쟁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설립 이후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500여명의 독립군 장병을 길러냈으며, 대 한 민국 항일독립투쟁사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 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 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 교 위치는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 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신 흥강습소를 세우고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독립지사들이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서간도 합니하에 비로소 마련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유적지 길림성 통화현 광화진 합니하 고려관자촌,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독립지사들과 부민단 단원들은 통화현 광 화 진 심산유곡 황무지 2백여만 평을 매입하여 병영을 짓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훈련하여 청산리전투, 영릉가 전투, 대전자 령 전투 등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흥무관학교 본교 유적지 대두자 농장터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 대두 자촌 신흥무관학교 본교가 있었던 대두자촌은 독립군 장병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려 있는 농토와 마을만 남아 있고 그 어느 곳에도 신흥무관학교의 역사 흔 적은 찾을 수가 없다. 신흥무관학교 본교와 분교의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