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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총본부 대구의 상덕태상회 평안도, 경기도, 강원도 등 국내 · 외에 연락기관을 설치하 여 독립군 자금 마련을 위한 기업체와 상점을 운영하였다. 국내에는 경상북도 영주의 대동상점을 비롯해 대구 · 삼척 · 광주 · 예산 · 연기 · 인천 등지에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연 락기관들을 설치했다. 연락기관들은 대부분 곡물상으로 설치되었으며 회원들의 집회장소 및 군자금 모집에 활용하였고, 중국 만주지역에 는 압록강지역 단동에 안동여관과 삼달양행(三達洋行), 장 춘(長春)에 상원양행(尙元洋行) 등 여관과 잡화상을 설립 해 독립자금확보와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독립항쟁 의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상동과 직산 광산, 경주의 우편송금차를 습격하여 군 자금을 모았고, 전국의 부호명단을 작성 하여 모금하기도 했으며, 그에 응하지 않 는 친일부호 장승원, 박용하, 양재학, 서 도현 등을 처단하기도 했다. 대한광복회는 우리민족의 항일역량이 3·1만세혁명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 항일독 립운동 단체 지원을 위한 독립자금 모금 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신흥무관학교 고산자와 합니하 는 박상진이 여러번 방문하여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서로군정서와 북 로군정서를 지원한 사실은 지금도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한광복회원의 활동은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할 업적으로 오늘날 기업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다. 상덕태상회 길림시 지부 기차역모습 대한광복단 기념비 경북 풍기읍 상원양행 활동지 장춘시내 현재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라. 서간도로 망명한 이회영, 김대락, 이상룡, 박경종 일가 등이 마련한 독립자금은 환율의 차이, 토지 매입비, 대홍수와 흉년, 풍토병 창궐 등으로 급격하게 소진되고 말았다. 신흥무관학교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돕기 위한 전국적인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을 중심으로 경북지역 민단조합 조직, 달성친목회와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하여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되었다.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우재 룡 · 권영만, 운영조직으로 재무부 · 선전부를 설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황해도 평산 의병장 이진룡(李鎭龍)을 부사령으로 임명했으며, 이진룡이 평양감옥에서 순국한 이후에 김좌진 (金佐鎭)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여 만주로 파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