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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의병전쟁의 위대한 전투┃37 ▶ 호남의병창의동맹단 전북 임실 운현 전투 1906년 가을부터 각지를 돌며 의병을 모으고, 국 권을 되찾자는 격문과 호소문을 전국에 보내는 등 1년 정도의 준비를 거친 이석용은 1907년 9월 의병 대의 이름을 호남의병창의동맹이라 정하고 본격적 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임실과 장수의 경계에 있는 운현(雲峴)에 진을 친 의진은 9월 12일 마이산으로 이동하여 궐기대회 를 개최하였다. 마이산 용암 위에 호남의병창의동 맹단이라는 깃발을 걸고 거행된 궐기대회에는 500 여 명의 의병과 이들을 성원하기 위해 모인 민중 등 1,0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고천제가 거행되고, 의진 약속 14개 조항과 의령이 선포되었다 . 이석용은 의병대장에 추대되었고,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등 10개 조직의 책임자가 정해졌다 1908년 3월 17일 임실읍을 습격한 이석용 의병은 기병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 를 올리고 퇴각하였다. 그런데 21일 장대비가 내리는 틈을 타 일본군은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운현의 이 석 용 부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빗물에 화약이 젖어 항전을 하지 못한 이석용 의진에서는 17명의 희생자 가 발생하였다. 이석용은 야음을 틈타 격전지의 가시덤불을 베고, 그곳에 단을 쌓은 뒤 자신을 따르다 순 국 한 의병의 영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리고 명복을 기원하였다. ▶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전투 호남의병장 고광순은 1907년 1월 24일 고제량,고광훈 등 친족들과 윤영기, 박기덕 등과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남원 의 양한규와 남원을 공격, 5월에는 능주, 8월에는 동복을 습 격하였다. 지리산 문수암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과 연합작전 을 구상,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연곡사, 화개동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대원들을 머무르게 한 뒤, 군대 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며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기를 북돋웠다.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9월 일본군의 연곡사 토벌작전에 의한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 량 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 호남의병대학살 사건 1909년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간에 보병 2개 연대 2,260명과 해군 수뢰정과 함대 그리고 현지 의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전북 남부로부터 경남 하동 서쪽의 전남 전지역의 의병을 대학살작전을 벌 였다. 전국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의병전쟁이 일본의 국권침탈을 무력화시킬 위기에 처하자, 무자비한 진 압작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420명의 의병을 사살하고 1,687명을 체포하였으며 455정의 총기를 빼앗았다. 전남지역은 의 병은 물론, 무고한 양민을 포함하여 인명과 재산상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의병들의 피가 호남 일대 산하를 물들였으며, 수천 명의 의병들이 강제 노동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렀다. 피아골 연곡사 전투지 및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호남창의동맹단 결성지 기념비 마이산 용암 호남창의동맹 임실 운현 전투 전적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