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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단발령에 앞장 선 부정부패한 관리를 처단하라. 제천의 자양영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호좌의진 은 그 기세를 몰아 이틀 만에 충주읍 인근에 있는 고을 을 장악한 가운데 의병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호좌의진에서 붙잡아 구금하던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 군수 서상기는 친일내각의 단발령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고을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었다. 유인석은 의진 의 수뇌부를 모아놓고 이들의 처리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들은 뒤, 2월 15일 그들을 참형(斬刑)하여 본보기로 삼았 다. 전열을 정비한 의진은 충주성 공략에 나서기로 했다. 충주는 지방제도에 따라 20개 군을 관할하는 관찰부 였다. 각 군에서 시행되던 이른바 개화정책은 1차적으로 관찰부의 지시를 받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충주지역은 관군과 일본군이 많이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그곳을 장악하는 것이 전략상 매 우 중요하였다. 더구나 당시의 충주관찰사 김규식은 단발령을 강제로 집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 ▶ 충주 관아공원에는 역사의 꿈이 서려 있다. 충주는 충청도에서 가장 큰 고을 중에 하나였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옛 자취로는 그날의 영광을 이야 기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이 있다. 현재의 관아길은 읍성이 있던 거리로 충주의 정치, 경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충주시청이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거리는 활력을 잃어갔지만, 충주의 역사와 지난 날의 영광을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충주 읍성이 복원되었고, 현청과 중원루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여러 개의 전통시장과 골목길의 풍경 을 볼 수 있는 전통의 거리기 때문이다. 역사의 고장 충주의 옛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만으로도 충주는 역 사 의 도시이며, 의병의 도시이다. 충주의 꿈은 여전히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마음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충주감영 관아공원 문루와 읍성 충주성 전투 표지판과 충주성 경기도 양평에서 기의한 이춘영과 김백선은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지평을 돌면서 포군을 모집하고, 영월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안승우의 의병진과 연합하였다. 그들은 의병투쟁의 성공을 위해서 명망과 권위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제천 자양영당에서 창의(倡義)의 비밀회의를 한 의암 유인석을 찾아가 의진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유인석이 이들의 지도자가 될 것을 흔쾌 히 받아들이면서 1896년 2월 2일 호좌의진이 창설되었다. 이춘영과 김백선이 원주, 지평 일대에서 모집한 포수 중심의 지평의병과 화서학파 유인석과 안승우 를 따르던 유생 중심의 제천의병이 연합한 의병진인 호좌의진은 선봉장에 김백선,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 좌군장에 원규상, 우군장에 안성해 등으로 의진을 개편한 후 의 병봉기의 뜻과 명분을 팔도에 알리니, 각처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을미의병과 호좌의진(湖左義陣) 충주성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