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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조선혁명군 국내진공작전 1932년 3월,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이 직접 밀파한 결사대원 이선룡, 변낙규 부대, 1933년 5월 황해 도로 진격하여 수많은 일경과 접전한 국내유격대장 서원준 등의 활약은 조선혁명군 국내진공작전의 일 환이었다. 조선혁명군 제3대장 변낙규는 대원들과 함께 평안북도를 거쳐 평안남도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국내 활동 거점을 조직하던 중, 이듬해 2월 평안남도 덕천에서 피체되었다. 또한 서원준은 1932년 3월 조선혁 명당 중앙위원장 고이허로부터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자금을 모집하고 연락기관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 았고, 총사령 양세봉의 명령으로 국내유격대장에 임명되어 권총과 탄약 등 장비를 지급받아 1933년 5월 국내로 침투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본부로 송금하였고, 조선은행 평양지점 을 습격하여 군자금으로 1,600여 원의 거액을 마련한 뒤 경찰에 발각되어 황해도 봉산으로 도피한 뒤에 도 사리원 경찰서 순사부장을 사살하는 등 맹활약을 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 정의부, 국내진공작전 정의부 독립군은 1925년 3월 18일 밤에 3대를 편성하여 압록강을 건넌 뒤 19월 새벽 공격을 동 시에 감행하였다. 제1대는 초산군 응암리와 추동 리 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소각하고 일경 순 사 부장 이하 3명을 사살하고 5명을 부상시켰다. 제2대는 압록강변에서 일경과 전투를 벌였고, 제3 대는 벽동군 여해동 주재소를 공격하여 경부 서천 융길을 사살하고 주재소를 소각하였다. 정의부 창설 이래 독립전쟁은 계속 되었다. 그 러나 1925년 6월 삼시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일본 군과 중국군의 독립군토벌 작전이 전개됨에 따라 국내진격작전에 제약이 많아 용이하게 추진되지 는 못했고, 참의부 작전만큼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참의부가 집안현, 관전현 등 국경선 근방에 그 근거지를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 에 정의부는 서간도 한인사회의 생활안정에 중점 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군 국내 진격지(압록강 일대) 독립군 국내 진격지(길림성 집안시 강변) 만주지역에서 계속 되었던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은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하루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일독립전쟁 50년의 역사적 사실들은 의병과 독립군 장병들의 고귀한 헌신과 희생으로 다시 찾은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다는 것을 오롯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