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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순국지를 가다. 일제의 앞잡이가 된 밀정 박창해가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하여 양세봉에게 중국 항일군의 지원과 연합 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환인현 소황구로 유인하였다. 1934년 8월 12일(음) 무기와 군자금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양세봉은 부관 김광욱, 김성해, 김추상과 같 이 왕명번을 따라 나섰다. 일행이 소황구를 가던 도중 돌연 옥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밀정이 뛰쳐나와 일 행을 포위하였다. 양세봉은 일본의 앞잡이가 된 그들을 위엄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주구들 의 저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항일독립전쟁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순국선열의 적 (敵)들은 피를 나눈 동족들의 가까이에도 독버섯처럼 존재했다. 조선혁명군 신개령 전투 유적지 ▶ 조선혁명군 최후의 전투 항일독립전쟁에서 조선혁명군의 민족주의 노선은 만주지역 한인사회의 통합과 항일정신을 이끌어갔 다. 1937년 3월 중순 경 조선혁명군은 약 200명의 부대를 유지하며 길림성 집안과 관전현의 변경지대에 있는 신개령에 튼튼한 산채를 구축하고 국내로 진격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 한 평안북도 경찰대는 초산과 위원경찰서에서 차출한 100여 명의 경관을 출동시키고, 만주국의 집안 · 환 인 경찰 및 관동군 정보기관과 협동하여 조선혁명군 본부에 대한 진압작전에 나섰다. 일본군 합동 토벌대 는 군용기까지 동원하여 3월 20일부터 약 10일 간에 걸쳐 조선혁명군 본부를 공격하였다.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활석은 1,004미터 고지에 위치한 요새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혁명군을 직접 진 두 지휘하며 전투에 임했으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장비와 병력을 앞세운 일 · 만 군에 큰 손실을 입고 패퇴 하 였다. 오랫동안 조선혁명군 근거지와 밀영도 함락소실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