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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한 역사신문 (사진 왼쪽)백포 서일 장군의 석상 (사진 오른쪽) 석상의 뒷부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구자"의 노랫 가사가 조각되어 있다. 복기대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선구자 노래가 연변에서는 서일 장군의 노래라고 하여 "용정의 노래"라고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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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徐一)은 함북 경원(慶源) 사람이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1911년 동만(東滿) 왕청현(汪淸縣)에 망명하여, 청일학교(靑一學校)·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는 등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한편 대종교(大倧敎)를 신봉하여 시교사(施敎師)로서 수년간에 걸려 수만명의 교우를 얻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와 총본사 전강(典講)을 역임하는 동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도해(圖解)」,「신화강의(神話講義)」,「진리도설(眞理 說)」,「삼문일답(三問一答)」,「회삼경(會三經)」등을 저술하여 교리를 전파하는 일면,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약 1만 5천여명의 단원을 거느린 단장으로 선출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일제와 무력항쟁을 하다가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청년동지들에게 정신교육을 통하여 자주독립의식을 심어주었다. 1919년에는 여준(呂準)·정신(鄭信)·김좌진(金佐鎭)·김동삼(金東三)·손일민(孫一民)·서상용(徐相庸) 등 38인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에 앞선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1독립운동에 앞선 조국의 독립선언이 되었다. 1919년 국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계 화(桂和) 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의 토대위에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하기 위하여 동북만에 산재한 대종교도(大倧敎徒)를 중심으로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여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신문을 간행하여 독립사상을 격려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는 김좌진을 맞이하여 정의단을 개편하고 임전태세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조직하여,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두고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었다. 그는 군정서의 총재로서 김좌진을 총사령겸 사관연성소 소장으로 임명하여 십리평(十里坪) 산림속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들에게 맹렬한 군사훈련을 실시한 지 1년여만에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을 치르게 되어 일군 3,300여명을 사살하는 독립군 사상 초유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총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의 전병력이 북만 밀산(密山)으로 옮겨갔으며, 국민회 독립군의 안무군(安武軍)·홍범도군(洪範圖軍)·광복단(光復團)·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모두 3,500명의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란 대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어 전 독립군을 지휘하였다. 그후 대한독립군단은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로 이주하고, 그는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겨가서 다시 기회를 기다리며 근무의 여가를 타서 교서(敎書)의 저술에 전념하던 중 1921년 9월 27일 토비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청년동지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나라잃은 슬픔에 겹쳐 부하들마저 무참히 희생됨에 통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이튿날 9월 28일 아침 마을 뒷산 산림속에 정좌하고 자결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부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