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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24년 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이와 같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의 탄압 은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으며,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 는 우리에게 일본은 나날이 침략의 손길을 뻗어왔다. 일본, 침략의 첫 걸음을 내딛다 일본은 1868년(고종 5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서 서구의 선진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보 다 앞서 개화에 눈을 떠갔다. 이로써,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우리의 조정에 통 상을 요구하거나 꾸준히 침략의 손길을 뻗어왔다. 1875년(고종 12년) 9월, 군함 운요호(雲揚號)의 불법 침입으로 야기된 조(朝) ‧ 일(日) 양국 간의 군사충돌 이 있었는데, 일본은 이 충돌의 책임을 우리 측에 씌 워 무력으로 강압,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 때 일본은 육군중장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를 특명전권대 사로 삼아 8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876년(고종 13년) 2월 10일 강화도에 도착, 그 전 해 9월에 발생 한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하여 강제로 수교조약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2월 11일 우리 조정 에서는 어영대장(御營大將) 신헌(申櫶)으로 하여금 강 화부(江華府)에서 조약체결에 임하게 했다. 그 결과, 2월 27일(음력 2월 3일) 12개 조항으 로 된 강화도조약(정식 명칭은 朝日修好條規, 1876년) 을 체결하였는데, 제1조에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였다. 제2조는 “양국 정부는 15개월 후부터 수시로 사신 을 서로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토의한다”라고, 제3조 는 “이제부터 양국 사이에 오가는 공문은 자국의 글 로 하되, 지금부터 10년 간은 별도로 한문 번역본을 첨부한다‘로 규정하였다. 제4조와 제5조에서는 20 개월 이내로 부산 그 밖의 2개 처의 항구를 개항하 고 여기에 일본 상인들이 왕래, 무역을 할 수 있게 하 며, 이 항구에 조계지(租界地)를 만들 수 있다“라고 규 정하였다. 제6조에서는 표류민과 난파선의 상호구 조, 제7조에서는 조선 해안의 측량과 해도(海圖)의 작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한 정족산성 남문 종해루 강화부 진무영 열무당(閱武堂) 앞에서 대포를 배치하고 수호조약 체 결을 강요하는 일본군(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875년 조선 근해에 불법침입한 운요오호(중앙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