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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4년 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월 17일, 목요일) 묘시(오전 6시 무렵)였다. 임진왜란 때 충렬공(忠烈公, 고경명)과 의열공(毅烈公, 고인후) 부자가 금산싸움에서 순국한지 315년만이요, 충렬 공의 큰아드님 효열공(孝烈公, 고종후)이 진주성 남 강에 투신하여 순국한지 314년 만에 고씨 가문에 또 한 번 충의의 높은 탑이 우뚝 솟는 순간이었다. 2007년 10월 21일(음 9월 11일) 오전 10시 정각, 연곡사 대적광전에서는 녹천 고광순 의병장의 명복 을 비는 추모법회가 열렸다. 피아골 계곡에는 100년 전 그날의 총소리 대신에 법고와 목탁소리와 염불소 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녹천(鹿川) 고광순의 삶 녹천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나라를 구한 의병장 제봉 고경명 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 因厚)의 12대 손이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 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은 위정척사 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과감하게 항일 의병투쟁의 길 에 나서게 되었다. 제천 의병장 류인석(柳麟錫)의 격 문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서는 가운데, 호남에서는 장성의 기우만 (奇宇萬)과 기삼연(奇參衍), 창평의 고광순과 나주의 이학상(李鶴相) 등이 1896년 2월 그믐날 광산부 광 산관(광주향교)에 집결하였다. 그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장성을 거쳐 정읍까 지 진격하였을 때, 조정으로부터 선유사 신기선(申箕 善)이 고종의 해산 칙령을 가지고 와서 해산을 명했 다. 이에 황제의 영을 거역할 수 없다 하여 순순히 파 병(罷兵; 군사를 흩음) 결정을 내려 거의(擧義)의 뜻 이 꺾이고 말았다. 의병 해산 뒤 고광순은 비분강개 하여 국치(國恥)를 씻고자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 만 했다. 그는 숨어 다니면서 영호남으로 출몰하여 백성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 이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광순은 고제 량과 함께 면암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면암은 체 1896년 고광순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정부의 단발령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올린 상소문(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