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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 김창환 · 이진산 · 윤덕보 · 김원식 선생 75 립당을 결성하여 조직위원장 으로 활동했다. 이후 북경에서 낙양군관학 교(洛陽軍官學校) 한인 입교생 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에 주 력했다. 이를 위해 만주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두천(金斗 千)에게 서신을 통해 만주지 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입 교생의 모집을 의뢰하여 만주 각지에서 18명의 학생을 모 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이 주는 의의 1910년 일본의 한일강제병합으로 일제에 의해 국 권을 빼앗긴 한국인들은 독립을 열망하였다. 그러 나 국권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 한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1919년 3 · 1운동은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 준 사건 이었다. 그동안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 던,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일반인들 에게 3 · 1운동은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만주(중국동북)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그중 에서도 무장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3 · 1운동 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 지 깨달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더이상 국내에 서 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만주지역으로 이 주하였고, 손에 총과 칼을 들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김창환 · 이진산 · 윤덕보 · 김원식 역시 그 시작과 활 동단체는 달랐지만 지향했던 바는 한국의 독립과 한 국인들의 자유 · 행복 등이었다. 따라서 그 길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탄생한 정의부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지 역에서 활동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오직 독 립을 위해, 그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끊임없는 노 력을 기울이며 그 척박한 대지에서 분투했던 것이 다. 경북 안동시 금계면 서후리 김원식 생가(출처 : 디지털안동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