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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⑥ 117 여정남·하재완 등 8명도 이곳에 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정으 로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들 은 대법원의 상고 기각이 있은 지 불과 18시간 만인 4월 9일 새벽 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 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작은 길을 건너 남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2008년에 개관한 배재 학당역사박물관이 있다. 1916년 에 준공된 배재학당 동관 건물에 들어섰다. 배재학당도 정동제일교회와 마찬가지로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중등사립학교이다. 배재 학당은 고종이 1886년에 하사한 이름이다. 배재학당은 주시경, 이 승만 등 한국근현대사에서 큰 족 적을 남긴 인물을 배출하였다. 건 국준비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해 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주도 했던 여운형도 배재학당에 입학 하여 1년간 공부했다. 서재필은 1896년에 한동안 교편을 잡았는 데, 배재학당 학생들이 협성회를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배재학당은 1916년 사립 배재고 등보통학 교 ( 약 칭 배재고보) 로 이름을 바꾸었다. 배 재 고 보 학생들 은 1919 년의 3·1 운동에 그 준비과정에서부터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배재고보 학생 장용 하(1900-1978)와 오흥순(1901- 1950) 등은 교사 김진호(1873- 1960)와 협력하여 독립선언서를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배포하 는 일을 책임졌다. 장용하는 3월 과 4월에 걸쳐 동료들과 함께 『반 도의 목탁』을 3호까지 발행하는 등 3·1운동의 진행상황을 알리는 출판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3 년 형을 언도받았다. 배재고보의 학생대표에는 김단야(본명 김태 연, 1901-1938)도 있었다. 김단 야는 1925년 박헌영과 더불어 조 선공산당 창당의 핵심멤버로 활 약한 인물인데, 일제의 체포를 피 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내를 오 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38년 소련에서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 배재고보는 1919년 3월 4일 밤 배재고보, 전수학교, 경신학교, 경 성의학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생도 40여 명이 모여 3월 5일 남 대문정거장(현 서울역) 앞에 모여 만세를 부르기로 합의하고 준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 로 하는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고, 「오마이 뉴스」에 ‘동작 민주올레’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 『낭 만과 전설의 동작구』, 『동작 민주올레』 등이 있다. 필자 김학규 배재학당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