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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9회) • 부산의 만세시위(1) 109 한 부산에서 만세시위는 엄중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 크게 확산되기 쉽지 않았다. 독립선언서의 전파 1919년 3월 3일 부산부 좌천동에서 한 기독교인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연행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는 이후 3월 9일 부산에서 만 세시위 움직임을 포착하고 사전에 저지시켰다. 일제 측 보고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내용이 나온다.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11보), 경상남도 부산.  종래 정온(靜穩)했었는데, 상업학교 생도에게 경성 학생단 명의로 독립운동을 권유해옴으로 학생들이  다소 동요의 기미가 있다. 엄중히 경계 중. 며칠 후 『매일신보(每日申報』 지면에 부산이 움직 이기 시작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소요사건의 후보(後報), 경상남도 부산, 만일을 경 계 중 금번 각처 폭동에 대하여 부산은 일시 평온하더 니 지난 9일 밤을 자고 나니 부산에 영주동 초량, 부 산진을 한하고 각처에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만세라 고 써서 붙였는데 민심이 흉흉함으로 당지 경찰서 에 서는 목하 엄중히 경계 중이라 하였다(『매일신보』,  1919.3.12). 이튿날인 3월 10일 부산상업학교 학생들은 학년 말 시험 기간이었는데, 시험을 중단하고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매일신보가 이러한 움직임을 보도하였다. 소요사건의 후보, 경상남도 부산, 즉시 해산시켜 부산에서는 오늘날까지 무슨 구체적 사실로는 드 러나지 않았으나, 관헌에서는 대단히 경계에 노력 하였다. 그래서 시내는 평온하여 아무 일이 없었으 나 부산공립상업학교는 다른 지방의 어떤 자로부터  선동 또는 협박을 받은 형적이 있어서 10일 목하 학 년 시험을 시행 중에 수험을 중지하는 등, 오히려 불 온의 거동이 있음으로 당국에서 탐지하고 운동의 파 급을 염려하여 10일은 임시휴교하였다(『매일신보』,  1919.3.13). 3월 11일 일신여학교 만세시위 3월 초부터 부산 지역 학생들의 움직임은 드디어 3월 11일 부산부 좌천동에 있는 호주 선교부에서 설 립한 일신여학교 만세시위로 나타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교사와 학생들(1915년)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 당시 일신여학교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