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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4년 2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을 견제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또한 『로코모티브 (The Locomotive)』의 편집장 폴란드인 브루슈프트 (Brooshooft)는 한국을 지지하고 일본을 규탄하는 행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렇지만 스테드 국제협 회 의장은 자신이 영국인이기 때문에 이를 상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한국을 동 정한다’고 수정되어 참석자 모두가 만장일치로 찬성 하였다. 이위종의 『한국의 호소』는 만국평화회의 관계자 들에게 일본의 불법적인 만행을 알리고, 한국의 입 장을 크게 동정하게 했던 것이다. 이위종의 연설이 있은 다음날인 7월 10일 헐버트의 연설이 있었는데, 그의 연설은 한국특사의 연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었다. 이준 열사의 순국 이상설을 비롯한 한국특사들은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장을 무대로 구국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렇지만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대는 대한제국 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게 하였다. 그런 가 운데 1907년 7월 14일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준 이 돌연 순국하고 말았다. 이준 열사는 사행의 목적 을 달성할 수 없게 되자, 참담한 현실에 분함을 이기 지 못하고 융호텔 숙소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준 은 뺨에 종기를 앓긴 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 이 아니었다. 그는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난 것’이었 다. 이준이 순국하던 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다가 벌떡 일어나, “우리나라를 도와주십시오. 일 본이 우리나라를 짓밟고 있습니다”라고 부르짖고 운 명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와서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조약이 무효임을 밝히려 했지만, 끝내 목 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을 헤이그의 ‘뉴 아이큰다 우(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 우선 가매장 하고, 유럽 열강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후 다시 헤이그로 돌아 와 9월 6일 정식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1963년 이준 열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운구되어 서울 수유리에 안 이준 열사의 유해가 묻힌 뉴 아이큰다우(Nieuw Eykenduynen) 묘 역(초기) 이준 열사의 유해가 모셔졌던 묘적(墓蹟)의 현재 모습(뉴 아이큰 다 우 묘지,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