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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수당 정정화, 임시정부의 안방살림을 맡다 99 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3일 뒤에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수당의 무용담이 상해 의 독립운동 동지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난 1921년 봄, 수당은 두번째 로 국내에 잠입했다. 이번에는 시댁을 들러서 친정 아버님에게로 갔다. 친정에서 이틀을 머문 후 아버 지가 건네준 돈을 전대에 소중하게 간수하고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기대한 것만큼 모금되지 는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고, 상해로 향했다. 수당은 1922년 6월과 10월에도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을 하 려고 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6월에는 국 내에 잠입한 후 7월 4일 시아버지가 상해에서 세상 을 떠났고, 1923년 3월에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 기 때문에 일이 여의치 않았다. 뜻한 대로 목적을 달 성하지는 못했지만, 상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23년 중 · 후반부터 임시정부는 날로 어려운 재 정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까스로 간판만 유지 하는 형편이었다. 수당은 시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이 곳 상해에 왔는데, 시아버지 김가진은 세상 을 떠 났다. 또 임시정부의 안방살림을 맡아 며느리처럼 살아가면서 어려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수당은 임시정부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안살림을 맡아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임시정부의 행사가 있을 때면 참으로 바쁜 여자였다. 이러한 그 녀의 삶은 임시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옮긴 후에도 계속되었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1900년대 초 서울 몽룡정앞에서의 김가진(국립 민속박물관 제공) 상해에서의 김가진 1930년대 중반 중국 남경에서 정정화와   남편 김의한, 아들 김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