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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수당 정정화, 임시정부의 안방살림을 맡다 97 해’라니, 가당 치도 않다는 생 각이 들었다. 수당은 옆자리 에 앉아 있는 친정 8촌 오빠 정필화(鄭弼和) 의 손을 잡았 다. 오빠의 손 길이 따뜻하였 다. “정화야, 너 무 걱정하지 마 라. 내가 상해 까지 잘 데려다 줄게.” 안심이 되었다. 수당은 이제 느 긋한 마음으로 앞으로 다가올 상해에서의 일을 떠올 려보았다. 그리고, 친정아버지가 시아버지께 전해드 리라면서 주신 8백 원을 묶은 전대(纏帶)를 만져보았 다. 허리에 찬 전대가 묶은 대로 잘 있었다. 안심이 되 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녀를 태운 기차는 어느 덧 의주에 와 닿았다. 이제 국경인 압록강을 건 너 봉천(奉天)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으로, 천진(天津) 으로, 남경(南京)으로, 그리고 상해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이 왜 이리도 멀고 험한지, 1주일을 넘겨 기차 안에서 먹고 자고 가자니 여간 고단한 길이 아니었 다. 여행증명서도, 여권(旅券)도 없는 그녀는 오로지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빠 정필화뿐이었다. 그런데, 날씨는 왜 이리도 매서운지. 깜박 잠이 들 었다가도 아랫도리를 따라 찬 기운이 온 몸을 파고들 면 그만 잠이 깨곤 하였다. 잠이 깨고 나면, 그녀는 창 밖을 내다보면서 이국 땅 상해에서 펼쳐질 막막 한 자 신의 삶을 그려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누더기 옷차림의 시아버님과 초췌한 얼굴의 남편을 떠올리 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였다. 이제 곧 상해에 닿으려니 했는데, 넓디넓은 들판이 이어지고 있을 뿐 아직도 멀었단다. 넓은 땅 중국이 어디 그녀의 손바닥이던가. 좁은 서울에서 시댁과 친 정집만을 가고오던 그녀의 단조로웠던 삶과 비교가 될 턱이 있었겠는가. 시아버님과 남편을 빨리 만나야 할 텐데, ……. 동농 김가진의 상해 망명과 조선민족대동단 활동 그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1919년 10월 10일, 조선 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총재 동농(東農) 김가진 (金嘉鎭)은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의 활 동의 폭을 해외로 넓혀나가기 위하여 망명의 길에 올 랐다. 이러한 결심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1920년대 초 상해 외탄(外灘) 전경(이원규 제공) 1919년 10월 경 상해 하비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