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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가 •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 77 을 주도했다.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 위원장,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위원장, 1945년 4월 국제연합 창립총회 한국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활약했다. 특히, 대통령 부인 엘리너(Anna Eleanor Roosevelt) 여사, 상원 원목(院牧) 해리스(Frederick B. Harris) 목 사, 뉴욕 패트릭 대성당의 스펠만(Francis J. Spellman) 대주교 등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에 게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인사들 과 친교를 유지하며 도움을 받았다. 또한 대통령과 국무장관·육군장관 등 미국 정부 요 인들, 법무부·육군성·해군성 등 미국 정부 부처, 정보 조정국(COI)과 전략사무국(OSS) 등 미국 정보기관, 군부의 장성과 장교들, 상하 양원 국회의원, 유력 언 론인·종교인·교육자 등에게 서한과 전보를 보내거나 직접 방문하여 지지를 요청하였다.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 기독 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등 미 국의 명망가들이 참여한 친한단체를 결성하여 미국 의 정부와 정계 및 언론계를 상대로 친한로비 활동 을 전개하면서 재미동포들로 하여금 미국정부와 국 회의원들에게 서한과 전보를 보내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인단체와 친한단체를 동원하여 대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와 같은 대규모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미국정부를 측면에서 압박하고,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 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 등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미국 침공인 ‘진주만사건’ 이 후부터 광복 전까지 그가 전개한 다양한 독립운동 방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한국의 국가주 권 내지 독립주권의 인정, 한국인의 연합군 가담과 대일항전 참전, 항일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 의 지원과 전쟁 시기 재미한인에 대한 대우 개선을 요청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의 소리 (VOA) 방송을 통해 한국민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언론과 방송 매체를 통해 일본군국주의의 야욕에 대 한 경계심을 일깨워주었다. 물론 이러한 외교독립운 동의 최종목표는 한국과 한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달 성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독립운동의 특징 배재학당 재학 때부터 광복 전까지 약 50년간 전 개된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민족의 독립역량을 축적 하려는 실력양성운동과 열강과 국제회의의 지원으 로 독립을 이루려는 외교독립운동으로 집약되었다. 전자는 집필·출판 활동, 연설·강연 활동, 학교·교회· 회사의 설립과 운영 등으로 나타났다. 후자는 미국 정부와 국제회의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지지 요청, 한국임시정부의 승인 촉구, 한국 독립세력에 대한 군사지원 요청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위임통치청원’문제 등으로 임시정 부 대통령에서 탄핵되었고, 외교독립운동을 우선시 하면서 무장투쟁 등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등 상당한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재직중인 1949년 스스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