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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가 •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 73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1919년 2월 파 리강화회의 의장과 미국대통령에게 “장 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해준다는 확실한 약속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어달라”는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했다. 한편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지도자급 인사로 추대되거나 선출되었다. 대한국 민의회 국무경, 조선민족임시정부 부도 령, 대한민국임시정부·고려임시정부·신 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한성임시정 부 집정관 총재에 이름이 올라갔다. 1919년 4월 14-16일 미국 펜실베이 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각지의 한 인 독립운동가들과 미국인 기독교 명 사들이 참여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했다. 한 국독립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한편, 기 독교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미국식 대통령제를 본뜬 정부를 원한다는 신국 가 건설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4월 30일 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수반 자격 으로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의장 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의 영문 국호인 ‘Republic of Korea’를 처음으로 사용 했다. 6월에 구미 열강과 파리강화회의 수장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지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과 유 지를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동시에 일본 천황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고하고 한반도에서 일본 군과 식민관리의 조속한 철수를 요구했다. 7월 워싱 턴에 대한공화국 공사관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외교 선전활동에 들어갔으며,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자” 상해교민단 주최 상해 도착 환영대회장에서의 이승만 임시대통령(1920.  12.28). 이동휘 국무총리와 안창호 내무총장이 양쪽에 서있다.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현지에 도착한 대표단 단장 이승만(오른쪽) 과 서기 정한경이 환영 꽃다발을 목에 건 채 사진을 찍었다. 이승만은 한국인  1호 미국 박사, 당시 30세인 정한경은 한국인 2호 미국 박사였다(국사편찬위 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