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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가 •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 71 도했다. 1899년 1월 고종폐위 음모사건으로 체포 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 안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여 기독교민족주의 자로 거듭났다. 그 후 양반 죄수들에게 전도하여 일 제시기 한국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다수 개종 시켰고, 죄수들을 위한 학교와 도서관을 운영했다. 또 『신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청일전기』를 번역했 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국민 계몽서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00년대 초 고종밀사로 도미 활동 및 미국 유학 1904년 8월 특별 사면령으로 풀려난 후 11월 고 종의 밀서를 갖고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헤이 (John Hay) 국무장관을 만나 한미조약에 규정된 의 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 다. 8월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면 담하여 한국의 독립 보전을 요청하고 한국민의 청원 서를 제출했다. 1905년 2월부터 1910년 6월까지 미국 동부의 명 문대인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 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을 받 은 중립)』라는 박사논문을 집필했다. 대학 재학 중 부 족한 학비를 벌기 위해 미국 동부의 기독교단체와 청 년단체를 돌며 200여 회에 걸쳐 한국의 역사와 문화 를 소개하고 일본의 침략을 고발하는 강연을 하였다. 1906년 여름 매사추세츠주에서 열린 만국학도공 회, 1908년 3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열린 세계선교 사대회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1908년 7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 국 동지대표자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의사진행을 맡았으며, 국민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저술·번역·출 판할 것을 결의하는 등 점진주의적 독립운동방안을 채택했다. 1910년 10월 귀국 후 서울의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 학 감으로서 주 일마다 오전 에는 서울의 여러 교회에 서 설 교 를 담 당 하 고 , 오후에는 매 회 200명 정 도가 모이는 미국에서 출판된 『독립정신』 구본(뉴데일리  제공) 독립협회 활동으로 수감 중 동지들과 찍은 이승만 사진. 아래 왼 쪽부터 네번째가 이상재. 뒷줄 왼쪽부터 이승만, 안명선(동지 안 경수 아들)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그리고 아버지 대 신 복역 중인 소년(국민일보 제공). 한성감옥에투옥된 이승만의 『천로역정』 등 도서대출 기록. 오른쪽  파란색 부분(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