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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최용신(崔容信) 선생 69 스물 다섯 나이에 과로로 세상을 떠나다 일본 유학 6개월 만인 1934년 9월 귀국하 여 다시 샘골로 돌아왔다. 신병에도 불구하 고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지도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YWCA가 샘골학원 보조금 지원 중단을 선언하여 경제적 부담까지 가중 되었다. 이에 1934년 10월 여성잡지 『여론 (女論)』에 ‘농촌의 하소연’이라는 제목으로 샘 골을 살리기 위한 사회 각계의 지원을 호소 하였다. 하지만 사회적인 반응은 냉담하였 고, 피로와 정신적인 고통의 누적으로 이듬 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마을주 민들의 지극한 기도와 정성에도 다시 일어나 지 못하였다. 결국 1935년 1월 25일 너무 짧은 25년 6 개월의 생애를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처를 찾 아 떠나고 말았다. 운명하는 순간 다음과 같 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 김군과 약혼한 후 십 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 고 죽으면 어찌하나 /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 다/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이처럼 최용신은 죽는 순간까지 샘골의 영 원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학생들에게는 다 정다감한 참다운 스승으로, 주민들에게는 영 원히 잊혀 지지 않을 불사조로 기억되고 있 다. 식민지 시절 일제의 수탈로 인해 피폐해 진 농촌을 살리고 계몽과 자립으로 민족역량 을 키우려 했던 그의 생애는 그래서 더욱 아 름답다. 정부는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 을 추서하였다. 최용신 묘(안산시 상록구 상록공원 내, 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최용신에 추서된 훈장과 훈장증(최용신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