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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최용신(崔容信) 선생 65 사업에 종사한 인물이었다. 즉 시세 변화와 더불어 집안 분위기도 크게 변모하였다. 이 러한 변화는 당시 서북, 관북지방의 일반적 인 양상이었다. 이 때문에 쉽게 근대교육에 접할 수 있었다. 어릴 때 그녀는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얼 굴은 물론이요, 정강이에도 마마 자국이 있 었다. 동네 아이들은 놀리는 등 심하게 구박 하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그녀는 깊은 사색에 몰두하면서 자랐다. 8세가 되던 1916 년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2년간 이곳에 다니다가 1918년 기독교계열인 원산 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졸업 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1928년 19세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학교목사인 전희균(全羲均) 선생 권유로 서울에 있는 협 성신학교에 진학하였다. 이곳에서 농촌사회 지도교육과의 황에스터(黃愛德) 교수를 만나 게 되고, 학문적인 토대와 아울러 학생들에 게 직접 농촌에 들어가 몸소 체험하고 실천 하는 것을 강조한 황교수를 통해 농촌계몽운 동에 뜻을 굳히게 되었다.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실 중 등학교 시절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루씨여학 교 졸업반 시절 기고한 『조선일보』 1928년 4 월 1일자 ‘교문에서 농촌으로’는 이러한 포부 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 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 한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 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중 등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각각 자기의 이상을 향하여 각자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 면 안될 것이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 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난 고로 현 농촌의 상황을 막 연하나마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구경(究竟)은 여 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에 교육받 은 여성들이 북데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 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 게 유감된 바이다. 문화의 눈이 구(舊)여성만 모인 농촌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 나 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중등교 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상록공원에 있는 최용신기념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