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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사국·박원희 부부와 동생 김사민의 비극적 서사 51 김사국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사건’으로 일경에 체 포되어 1년 6개월동안 서대문형무 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1922 년에는 나중에 ‘서울파’로 불리는 서 울청년회와 고려공산동맹의 조직에  참가하였다. 박원희는 남편 김사국 과 함께 1923년 북간도 용정의 동 양학원에서 활동했고, 1924년 조선 여성동우회, 1925년 서울청년회 집 행위원, 1927년 근우회 등에 참여 하는 등 활발한 여성운동과 사회운 동을 전개하였다. 김사국·박원희 부 부는 국내외에서 각종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에 종사했으며, 북간도(중 국 연변)에서는 동양학원을 통한 민 중교육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30 대 초 · 중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 절하고 말았다. 김사국의 아우 김사 민도 형과 함께 활동하면서 여러 투 쟁에 동참했다. 특히 그는 1922년  11월 소위 ‘신생활사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6 · 25전쟁 때 행방불명(사 망)된 것은 김사국 일가의 일대 비극 이 아닐 수 없다. 김사국 · 김사민, 어머니 안국당과 금강산 유점사에 가다 김사국(金思國)은 1892년 5월 9일 충남 연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 친은 연안 김씨 김경수로 원래 강원도의 수백석의 도지(賭地)를 갖고 있 는 지주 출신으로 억울하게 땅을 빼앗겨 6년 간의 긴 소송을 했었다고 한다. 김경수는 1904년 6월 김사국이 13세 때 사망하였다. 김사국의 어머니 순흥 안씨 안국당은 남편의 3년 상을 마치고 김사국과 여섯 살 아래인 동생 김사민(金思民)을 데리고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갔다. 유점 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금강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절이었다. 그곳 에서 김사국의 어머니인 안국당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13세와 7세인 김 사국, 김사민 형제에게 독선생을 붙여 불교와 한학(漢學)을 가르쳤다. 그들 형제는 다른 아이들보다 삼사배를 가르쳐도 몇 번만 일러주면 곧 돌아앉아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새롭게 바뀌어 갔고 어머니 안국당은 아이들에 게 신식교육을 시킬 필요를 느꼈다. 1907년 안국당은 16세의 김사국 과 10세의 김사민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왔다. 김사국은 보성학교를 수 학하였다. 1908년 일본에 건너가 피혁회사 등을 다니며 고학을 하다가 1908년 4월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 친목 및 학술단체인 대한학회(大韓 學會)에 가입하였다. 1909년 1월 도쿄(東京)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 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가입하여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하 였다. 3 · 1운동과 국민대회 사건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후 김사국은 만주(중국 동북지방)로 건너 갔다가, 다시 귀국하여 1911년 관립 한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 년 한성중학교를 졸업한 김사국은 함경남도 덕원 당우 소학교에서 교 사 생활을 하였다. 1918년 무렵 김사국은 만주 철령(鐵嶺)으로 건너가 서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산하 육영학교에서 수학하고 개원(開原) 농 장에서 농업견습 등을 하면서 민족독립을 모색하였다. 한편 김사민은 1917년 서울에서 조선보병대에 들어가서 근무했다. 조선보병대는 대 한제국의 황실 경호와 의전을 맡은 조선의 마지막 근위병이라고 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