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page

Special theme • 민족 독립을 위한 삶,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49 혀 국내로 압송된 도산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생 활을 하였다.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도산이 일제의 가혹한 감옥에서 생활하기는 정말로 어려웠 다. 이혜련은 남편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하지 않 았다. 도산의 강직한 성격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절대로 단식을 하 지 말라고 전보를 보냈다. 안창호는 옥중에서 이혜련에게, “내가 평생에 당 신에게 기쁨과 위안을 줌이 없었고, 이제 느즈막에 와서 근심과 슬픔을 주게 되오니 불안한 마음을 측 량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가사와 아이들에 대한 모 든 시름을 늘 혼자 맞게 하니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라고 하였다. 도산은 국내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 을 때, 이혜련은 남편을 대신하여 늘 그랬듯이, 집안 을 돌보며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도산이 국내에 있 을 동안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 지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이혜련의 집은 도산이 없어도 여전히 독립운동을 논의하는 곳 이였으며, 미주 애국부인들의 집회 장소였던 것이 다.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의 모든 행사에 꼭 참 석하여 회의를 주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 국내에 있는 민족 주의 단체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평양의 동우회 회원 들과 송태산장에 은거하고 있던 안창호를 체포하였 다. 서울로 압송된 도산은 11월 1일 종로경찰서 유 치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나 12월 24일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가 심해지면서 보석으로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병원에서 향년 60세로 별세하였다. 도산이 세상을 떠나면서, 안창호 · 이혜련의 부부 인연도 끝이 났다. 도산이 서거하였다고 이혜련의 집에 동포들의 방문이 결코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늘 사람들로 넘쳐났다. 한인 학생, 도산의 동 지들, 그리고 한인 2세 등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 다. 태평양전쟁기 그들은 다양한 군복을 입고 이혜 련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혜련은 미주 한인사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언제나 든든한 어머니로서 역할을 해 왔다. 이혜련이 80세가 되었을 때인 1963년, 한국정부 에서는 도산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래서 훈장 을 받기 위해 한국에 초청을 받았다. 이혜련은 1902 년 젊은 새댁으로 고국을 떠난 이후 61년 만에 처음 에 고국의 땅을 밟게 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 하고, 생을 마친 도산의 무덤에 갔다. 이혜련은 1969 년 4월 21일, 86회 생일에 영면하였다. 서울 강남에 는 안창호를 기념하는 도산공원이 조성되어 기념탑 과 동상이 세워졌다. 이혜련의 유해는 1973년 11월 10일 일생을 서로 떨어져 지냈던 남편 안창호와 재 회하였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 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 사회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 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