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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4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부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본다 도산은 미국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두 달가량 같 이 지냈다. 6년 동안 집을 떠나 미국에 다시 돌아왔 지만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은 없었다. 동포사회 와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 각지를 순방하고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도산 자신도 “당신과 아이들 하고 같이 있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또 멀리로 갈 것 을 생각하니 마음이 때때로 처참합니다”라고 하였 다. 도산이 오랫동안 중국에 있다가 미주에 돌아와 서도 집에 있지 않고 돌아다니니 화가 나서, 이혜련 은 남편에게 ‘등한한’ 가장이라고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도산은 “당신이 나를 등한한 사람이라고 함에 대하여 나는 조금도 부인하지는 않 고 그렇다고 자처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 야 근본이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여지껏 잘 참더니 왜 늙어 가면서 참지 못하고 그리 야단을 칩 니까”라고 하였다. 가정사를 등한시한다는 아내의 책망을 들은 도산은, 미국 동부 순행을 그만둘 수밖 에 없었다. 도산이 로스앤젤레스 집에 돌아왔기 때문에 그를 보기 위한 동포들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멀리서 방문한 동포들을 먹이고 재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 요 했다. 이혜련은 식비를 마련하기 위해 병원이나 부 유한 백인들의 집을 밤낮으로 청소하고, 빨랫감을 세탁하고, 바느질을 하였다. 1년 2개월 정도 미국에 서 활동하던 안창호는 1926년 3월 2일, 샌프란시스 코를 출발하여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 다. 그가 떠나기 전에 부인 이혜련은 임신하고 있었 다. 중국 상하이로 돌아간 도산은 아내에게 “당신의 태기 있는 것을 아이들한테 편지하려고 하였으나, 내가 무어라고 말할는지 하도 염치가 없어 못 썼나 이다”라고 하였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다시 중국으 로 온 도산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 이름은 남자이면 ‘필영’이라 하고, 여자이면 ‘수경’이라 하는 것을 뜻 합니다”라고 하였다. 도산은 임신한 아내에게 너무 나 염치가 없었다. 도산의 옥중생활과 순국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 직후 도산은 일제에 체포되었다. 일제에 붙잡 미군에 입대한 안창호의 자녀들, 안필영 · 안필립 · 안수산 도산 서거 25주기를 맞아 망우리의 도산 묘소를 참배한 이혜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