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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4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부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본다 을 집 뒤 대나무밭에 있던 토굴에 숨겨주면서 시작 되었다. 광복회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이 를 바탕으로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목표 아래 군 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에 따라 이동흠은 1918년 4 월 경북 봉화군의 부호 이정필(李廷弼)에게 군자금 1,000원을 헌납하라고 요구하는 광복회 통고장을 보냈다. 이를 일제가 탐지하여 이동흠이 1918년 4월 체포되었고,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8년 12월 20일(음력, 양력 1월 21일) 고종이 서 거하자, 이중업은 숙부 이만규(李晩 煃 , 1945~1921) 와 함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당시 파리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려 약소국을 구제하기로 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림들은 유림단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여기에 이중업은 제1차 유림단의거 (파리장서)의 추진세력으로 강원도와 충청도 등을 다 니면서 서명자를 확보하는 책임을 맡았다. 남편 이중업이 ‘독립청원서’를 보내기 위해 노력 하고 있을 때, 아내 김락은 58세의 나이로 직접 ‘대 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 안면에 일어난 예안만세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고등경찰요사』 ‘총설’의 “1919년 소요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라는 내용을 통해 김락이 3 · 1만세 운동에 참가한 점, 일본군 수비대에 잡혀 취조를 당 했고, 그 과정에서 실명을 했다는 점, 이후 11년 간 고통 속에서 삶을 이어나갔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들 이동흠이 광복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고, 남편 이중업도 파리장서운동으로 둘째 아들 이종흠과 함께 집을 비운 상황이었다. 이 때 56 세의 김락이 예안 3 · 1만세운동에 직접 나섰는데, 이 중업 · 이종흠 부자의 행적 때문에 더욱 심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중업은 1920년 말, 회당 장석영(張錫英, 1851~1926), 성재 권상익(權相翊, 1863~1935), 중 재 김황(金榥, 1896~1978), 문암 손후익(孫厚翼, 1888~1953) 등과 논의하여 중국 유력인사 쑨원[孫 文, 1866~1925]과 우페이푸[吳佩孚, 1873~1939]에 게 독립청원서를 다시 보내기로 했다. 권상익은 쑨 원과 중국정부에 보낼 2통, 장석영은 우페이푸에게 큰아들 이동흠 작은아들 이종흠 큰사위 김용환(이상 국가보훈부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