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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3대 유림 독립운동의 중심 추, 이중업 · 김락 부부 39 던 아버지 이만도가 1910년 8월 나라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24일 동안 단식이라는 방법으로 자정(自 靖) 순국하자, 이중업은 아버지의 투쟁정신을 이어서 1919년 파리장서운동 등에서 활약하였다. 김락 친정식구들의 항일투쟁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자정순국의 길을 선택한 이도 있고, 만주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한 이들도 있 었다. 김대락(金大洛, 1845~1915)과 이상룡은 망명 을 선택하였다. 김대락은 이중업의 큰처남이자, 김 락의 친정오라버니이고, 이상룡은 이중업의 큰동서 이자, 김락의 큰형부였다. 김대락은 1910년 12월 24일 만 65세의 나이로 가 솔을 이끌고 추풍령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신의주로 향했다. 1911년 1월 8일 압록강을 건넜다. 최종목적지인 봉천성 유하현 삼원포로 가기 위해 동 생인 김효락 · 김소락 · 김정락의 자손은 물론 김동삼 일가까지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상룡은 1911년 정월 5일 망명길에 올랐고 그 가족은 보름 뒤인 1월 20일 고향을 떠났다(박민영,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지식산업사, 20 20, 84~85쪽). 1월 25일 신의주에서 가족과 이상룡이 합류하였고, 1월 27일 압록강을 건넜다. 1911년 2월 7일 길림성 회인현 횡도천에 도착했고, 북산, 두릉 구, 영춘원 등을 거쳐 10월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 에 정착했다. 김대락과 이상룡은 만주에서 경학사, 신흥강습소 (뒤에 신흥무관학교), 공리회, 부민단, 백서농장 등 한인들의 정착과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활동하였 다. 1915년 김대락은 만주 땅에서 세상을 떠났고, 1925년 이상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으 로 취임했다. 반석현 등을 거쳐 1932년 서란현에 정 착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중업 · 이동흠 부자의 항일투쟁 나라가 망하자, 집안 어른은 목숨을 내놓았으며, 처가 · 친정 식구들은 만주로 떠났다. 1917년 늦가을 큰아들인 이동흠(李棟欽, 1881~1967)도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활동은 1915년 조직된 비밀결사 광복회(光復會)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안동 내앞마을 김락이 살던 집 ‘백하구려’(박민영, 『향산 이만도』) 김락의 형부 이상룡이 살던 집 임청각(194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