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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4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부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본다 태어나 18세에 이중업과 혼인하고 2남 3녀를 두었 다. 1919년 3월 17일 58세의 나이로 안동군 예안면 에 일어난 예안만세시위에 직접 나섰다가 일본군 수 비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끝에 실명한 인물이다.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이만도 · 이중업 부자의 항일투쟁 이중업의 아버지이자, 김락의 시아버지인 향산(響 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는 1894년 음력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는 사건과 음력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음력 11월 단발령 등으로 전국 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성의진(宣城義陣)’이라고 불리는 예안의진(禮安義陣)의 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이중업도 아버지와 함께 의병활동에 나선 듯하다. 『기암유고(起巖遺稿)』(이중업의 문집)에 실 린 「행장」에는 “을미년(1895) 적신(賊臣)들이 왜적 의 군대를 끼고 국모를 시해한 뒤 임금을 협박해 폐 위 전지(傳旨)를 내리게 하고 국상(國喪)을 내지 않 았다. 군(이중업)은 분통함을 이기지 못해 여러 동지 들에게 서찰을 보내고 또 의사(義士) 김도현(金道鉉, 1852~1914)에게 요청하여 원수를 토벌할 계 획 을 은밀히 논의했지만, 시골뜨기 백면서생 가운데 죽음을 무릅쓰고 곧장 달려들 만한 자가 없었으므 로, 군은 몰래 격문을 써 원지(遠地)에 부친 뒤 본 군(本郡)에 되레 통지되게 하여 군중들의 마음이 격동되길 바랐다. 12월 적신들이 다시 임금을 협 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였으니 재앙의 조짐이 더욱 심해졌다.”고 적고 있다. 국모시해 후 이중업이 몰래 썼다고 하는 격문은 「당교격문(唐橋檄文)」이다. 이 격문의 내용은 상주 함창과 문경 점촌 경계에 있는 당교에서 벌어진 두 차 례 전투와 관련이 있다. 하나는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신라의 승전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왜병에 맞 서 의병(권의중 · 권용중 형제)이 치렀던 전투이다. 이 중업이 이 격문으로써 의병을 일으키자고 제안한 것 으로, 아버지 이만도의 뜻과 다르지 않았다. 선성의진에 참여했던 이중업은 1905년 ‘박제순- 하야시(林權助) 억지합의(을사늑약)’로 외교권을 상 실하자, 아버지 이만도의 뜻에 따라 이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왜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오적을 처 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중업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주도적으로 움직이기도 하였다. 관련 사실은 『기암유고』에 실린 류봉희(柳鳳熙)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봉화 닭실의 안동권씨 인물들을 만났고, 삼산의 전주류씨 류봉희 와 만나 거사계획을 상의했다. 또 영향력 있는 원로 들이 문생과 일가친척들을 거느리고 의병에 합류해 주기를 바랐다. 일월산 서북쪽 산촌으로 들어가 남루한 차림에 산 나물로 연명하며 스스로 죄인이라 일컬으며 은거하 이만도 · 이중업이 살던 집 향산고택(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