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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4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부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본다 수수를 심어 식량을 마련하면서 중국인에게 함께 싸 우자고 권했던 일화는 아직도 중국인들의 기억에 남 아있다. 중국 요녕성(遼寧省) 흥경현 평정산 난천자(1911)- 환인현 팔리전자 취리두(1912)-환인현 보락보진 남 괴마자(1912)-환인현 취리두(1915)-무순 포가둔 (1915)-무순 포가둔 외곽지역까지 이르는 윤희순 · 유 제원 일가의 독립운동은 쉼없이 이어진다. 노학당(老學堂)에서 일가족의 독립 꿈을 펼치다 윤희순 · 유제원 부부의 독립활동에서 대표적인 활 동은 구국계몽운동을 실천한 ‘노학당(老學堂)’의 건 립이다. 시백부 유인석의 국난극복정신과 시부 유홍 석의 의병문화정신이 비로소 결실을 이룬 시대정신 을 계승한 공간은 학교였다. 항일민족정신을 고취시 키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설득은 이회영 · 우병렬 · 도원 훈 · 채인산 · 손홍령 등의 지지와 찬조로 1912년 노학 당 건립으로 실현된다. 아하(雅河) 강변의 남괴마자에 자리잡은 노학당은 교실과 운동장, 식당, 기숙사, 샘, 화장실 등의 시설 이 갖추져 있다. ‘문화지식이 있고 애국정신으로 국 권회복을 위해 목숨바쳐 싸울 수 있는 항일인재의 양성이 필요하다’는 설립취지는 창립목적에 투영되 었다. 3개 반으로 나누어 주 6일간 5시간씩 운영된 수업은 역사 · 국어 · 수신 · 한문 · 작문 · 지리 · 이과 등으 로 교과목이 진행되었고 박은식 선생과 신채호 선 생이 수업으로 방문하곤 했다고 한다. 노학당에서 50여 명의 항일인재가 양성되었고 독립운동의 핵 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일제의 정치간섭에 저 항하며 반일인재양성의 요람이 되었던 노학당은 1915년 폐교되었고, 그해 윤희순의 남편 유제원도 세상을 떠났다. 조선독립단에서 가족부대까지, 삼형제로 이어지다 노학당의 폐교를 기점으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토벌 활동은 격화되었다. 1915년 윤희순 일가는 무 순 (撫順) 포가둔(包家屯)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무순 지역은 1930년 초반까지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였 던 반면 일제가 항일 투사를 감금하여 살해한 무순감 옥(撫順監獄)이 있던 곳이다. 유인석의 서거 이후 윤 희순 일가는 만주와 연해주 · 간도 일대에서 흩어진 의병운동의 후손과 의병가족을 찾아 나섰다. 180여 명의 의병계통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독립군단의 성 격을 띤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조선독립단(朝鮮獨立 團)이다. 윤희순 · 유제원의 아들 유돈상과 유민상은 조선독 립단 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지도했고, 유씨네 가족과 친척들로 구성된 가족부대를 조직하여 통신 연락 · 모금활동 · 정보수집 · 군사활동 등 무장된 부대 로 갖추었다. 1931년 일본이 중국 동북을 침략하자 2002년 8월 요녕성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세워진 ‘노학당  유지’ 기념비(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