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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24년 1월 Column  명사 칼럼 ① 작은 소리 큰 울림 1964년의 갑진년: 일본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 비록 나라를 잃었다고 해도, 우리 민족이 독립정 신 그 자체를 잃지는 않았다. 이미 구한말 이후, 이 어 대한제국 성립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의 병의 투쟁 연장선 위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새롭게 전 개되었으며, 그것은 1919년 기미년(己未年)에 거족 적 3 · 1운동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1919년 4월 11일 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 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후 일제의 탄압을 포함한 온갖 역경 속에서 우여곡절과 기복 을 겪으면서도 항일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갔고, 우 리 겨레는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패망과 더불 어 마침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남북분단이라는 뜻밖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였지만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에 이남에서 대한 민국을 세울 수 있었고, 1948년 9월 9일에 이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었다는 인 식은 남(南)이건 북(北)이건 일본과의 ‘화해’를 가로 막았다. 이 점은 북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래도 대 한민국은 1961년 성립된 5 · 16군사정부 때부터 일 본 과의 ‘화해’를 추구했고, 5 · 16군사정부가 1963년의 선거를 거쳐 제3공화국으로 바뀐 직후부터 일본과 의 ‘국교 정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국민적 저항은 우선 1964년 갑진년 3월 24일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 시위’로 나타났다. 이 시위는 곧바로 전국 으로 확대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6월 3일에 비상계 엄령 선포로써 상황을 전환하려고 했다. 이것이 이 른바 ‘6 · 3사태’였다. 정부는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 되었다고 판단하며 새 학기의 시작을 앞두고 계엄 을 풀었지만,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1965년에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약을 체 결하고도 위수령(衛戍令)을 선포해 반대세력을 제압 한 뒤에야 국회에서 비준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잊지 않아야 할 대목은 한일수교에는 미국 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1904 년 갑진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1905년 을사년에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듯, 1964년 갑진년에 일어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마무리하는 서울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당시  태극기와 현수막,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선 시민들 ‘한일굴욕외교반대’ 구호를 펼쳐든 여학생(이상 나무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