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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8회) • 논산군의 만세시위(2) 109 며 시위를 한 후 읍 내 서정(西町)쪽으로 행진하며 독립만세 를 불렀다. 일제는 논산과 강 경 시위계획 정보를 사전에 통보받고 전 날인 3월 19일 공 주에서 하사 이하 8 명을 논산과 강경에 파견했었다. 이들은 20일 강경경찰서 소속 경찰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진압하였다. 시위진압 과정에서 주 민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날 영국인 선교사 존 토마스(John Thomas) 일 행이 교회 일 때문에 강경을 방문하였다. 이 때 일제 가와타[河田] 순사의 과격행동이 국제적인 문제가 되 었다. 토마스 선교사를 독립운동 관련자로 생각하여 붙잡아 인정사정 없이 구타하고 경찰서에 붙잡아 갔 다. 영국 영사관 문서에 토마스 선교사의 증언이 남 아 있다. 존 토마스 목사의 상황 증언(보고) 1919년 3월 19일 목요일, 나는 조선인 선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강경을 방문하겠다고 알렸다. 1919년 3 월 20일 목요일 오후 3시 강경에 도착했다. 그곳에 서 만세를 부르고 지나가는 조선인 소년들을 마주쳤 다. 그 이후 일본인 병사들이 와서 나를 폭행하고 경 찰서로 끌고 갔다. 경찰서에서 여러 질문들이 쏟아졌 다. 얼마 후 서장이 와서 내게 미안하다고 보내준다 고 했지만, 나는 거부했다, 밖에 군중들이 있었기 때 문에. 얼마후 서류를 가져와 사인을 하면 보내준 다 고 했지만 거부했다. 8시 40분 기차를 타야 해서, 경 찰서 두 명을 붙여줘서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영사관 문서 No. 800: Intervention of U.S. Government in Reestablish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etc. Volume 202].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폭행 구금 사건은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당황한 일제는 이 사건을 교묘히 왜 곡하여 시위군중이 토마스 선교사를 폭행한 것으로 조작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1920년대 강경 시장의 모습  강경 옥녀봉 정상의 ‘강경항일 독립만세운동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