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page

3월의 전설(98회) • 논산군의 만세시위(2) 107 이루는 추석과 설 대목에는 15,000명 이상이 모여 들었다. 강경의 최대 인구는 3만여 명에 달했으며 상인 등 유동 인구까지 합하면 10만 명에 이를 정도 였다. 각종 수산물이 강경으로 집산되자 거래되고 남은 물량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염장법과 수산 가 공법이 발달했다. 이리하여 새우젓 등 젓갈류의 국 내 최대 공급시장으로 번창했다. 이 때문에 군청은 논산에 있었으나, 논산보다 강경 이 먼저 읍으로 승격되었고, 논산경찰서, 대전지방법 원 논산지원, 대전지방검찰청 논산지청도 논산 읍내 가 아닌 강경읍에 있었다. 만세시위도 강경에서 크게 일어났다. 3월 3일 강경 시위 경성의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이 가 져온 독립선언서 약 40매가 전주, 이리를 거쳐 함열 천도교 신도 민영순(閔泳淳)을 통하여 3월 2일 오후 6시경 논산 읍내 욱정(旭町) 천도교 논산교구실에 전 달되었다. 이 선언서가 논산 읍내에 뿌려지자 경찰 이 교구장 손필귀 외 2명을 붙잡아 강경경찰서로 보 냈다. 강경면에서는 다음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3월 3일 오후 3시 반쯤 시민과 학생 약 100여명이 태극 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강경 최초의 독립만 세 시위였다. 경찰이 달려와 이를 해산시키고 주모자 십여 명을 검거하였다. 1919년 3월 5일 군산 영명학교 학생 강금옥(姜今 玉)이 익산군 웅포면 대붕리에서 부여 세도면의 사 립 창영학교 청년 교사 엄창섭(嚴昌燮, 20세)에게 독 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엄창섭 교사는 다음날 또는 그 다음날인 3월 6~7일경 창영학교에서 고상준(高相 俊, 20세, 농업), 추병갑(秋炳甲, 20세, 농업)과 만나 3월 10일 강건너 논산군 강경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 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3월 10일 아침까지 태극기 200기를 제작했다. 1920년대 강경포구 전경 현재의 윗시장 터 원경 강경읍내 옥녀봉 원경(해발 34.6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