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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 미주 한인의 첫 도착지 · 출발지,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지 호놀룰루 97 고 싶은가? 우리 민족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돈을 주선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백범은 “무 슨 사업을 하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으나 간절히 하 고 싶은 일이 있으니, 조용히 돈을 모아두었다가 보 내라는 통지가 있을 때 보내라”라고 회답을 보냈다. 그랬더니, “그리 하겠다”고 회신이 왔다. 김구는 이봉창의사의 거사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는 가운데, 미국과 하와이에 편지를 보냈다. 하 와이에는 미화 몇 백 달러를 백범에게 보내주었다. 『백범일지』에, “나는 그 돈을 받아서 거지 복색인 전대 속에 몰래 감추어 두고 예전 그대로 걸식생활 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나 이외엔 아무도 허름한 옷 속에 천여원의 거액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와이 동포들이 백범에게 보내준 독립운동 자금 은 이봉창·윤봉길의사 의거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결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백범이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제공받은 독립 운동 자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미주동포들 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한 후, 그의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 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위에서 죽는 것이라고 했다. 이봉창의거 이후 조직된 한인애국단 하와이지부 에서는 인구세(人口稅)와 의연금 등을 거두어 임시 정부에 제공하였다. 1934년 하와이애국단으로 공 식 성립되었고, 카우아이섬의 한인단합회도 각종 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보냈다. 태평양전쟁기 하와이 한인의 독립운동 자금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 족대회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거두는 모든 자금을 ‘독립금’으로 통일하고, 기존의 각종 모금을 폐기하 기로 결의했다. 이같은 결의에 따라 매년 ‘독립금’ 2 만 달러를 모집하기로 하고 모집금액의 2/3는 임시 정부로 보내고, 나머지는 외교비나 미국국방 공작 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는 ‘독립금’을 1년에 1인당 15달러 이상 거두기로 했다. 또 북미 집행부에서 회계를 담당하고, 하와이 의사부의 결의로 집행부에서 지출하도록 했다. 태평양전쟁 기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모집 한 독립운동 자금 전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1941 년 5월 15일부터 해방 이후인 1948년 12월 31일 까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의 「 재정보고서」 를 통해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현황 을 얼마간 짐작해 볼 수 있다. 1941년부터 1948년 까지 하와이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모집 한 금액은 185,630달러이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가 모집한 총금액의 68.63%는 하와이 한인들이 부 담했고, 나머지 31.37%를 북미의 한인들에게서 모 집했다.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 모금한 금액 총 185,630달러 가운데 해방 후에 한국대표 단 파송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경비, 해방조선 출 판비 등을 제외한 순수하게 독립운동과 관련된 비 용은 159,581달러이다. 이 금액을 2023년 구매가 격으로 환산하면, 3,166,306달러이다. 즉, 약 316 만 달러이다. 하와이 의사부에서 모집한 독립운동 자금의 항목을 보면, ‘독립금’이 83,439달러로 전체 모집 금액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승 전후원금으로 26,694달러(14%), 워싱턴사무소의 운영경비로 14,606달러(8%), 군사운동후원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