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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 미주 한인의 첫 도착지 · 출발지,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지 호놀룰루 93 립협회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합동하여 1909 년 2월 ‘국민회’를 성립시켰다.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되었고,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지 방총회가 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가 성립된 초기에 는 1,000여 명의 회원과 24개의 지방회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방회의 조직과 회원 확보에 노력하여 1909년 10월 하와이지방총회 산하에 60여 곳의 지 방회와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미의 유력한 단체인 대동보국회는 국민회 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은 시대적 대세였고 여기에 대동보국회도 더 이상 이 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따라 두 단체의 통 합에 합의를 하게 되었고 대동보국회의 ‘대’자와 ‘국 민회’를 합쳐, 1910년 2월 10일부터 ‘대한인국민회’ 라는 명칭으로 미주 한인단체가 모두 통합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탄을 당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노예가 되었다는 소식은 하와이 시간으로 8월 28일 오후 9 시 50분에 즉각 전해졌다.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한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통곡했고, 그 날 아 무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모여 일본 에 반대하기로 했으며, 집안에 있는 일본물품을 모 아다가 불을 질렀다. 산넘어 아희들,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 1914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 시내 동북쪽으로 5km 떨어진 카할루우(Kahaluu)에서 대조선국민 군단 사관학교의 낙성식과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300여 명의 한인 청 년들은 독립군이 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했 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으로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매우 중요한 하와이의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북미에서 한인소년 병학교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한 바 있는 박용만(朴 容萬)에 의해 창립되었다. 박용만의 독립운동 노선 은 군인을 양성하여 원동에 파견하고,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다. ‘대조선국민군단’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자치규정(1913. 2. 1)   하와이지방총회 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