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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23년 12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한국인의 공식적인 하와이 이민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903년 1 월부터 1905년 8월까지 64회에 걸쳐 7,400여 명 이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하와이로 온 한인들은 지 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 을 하게 되었다. 하와이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땅 을 파고, 사탕수수를 심고, 물을 주고, 자르고, 옮기 는 등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힘들고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한국인들은 단체를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설립했다. 한인단체, 한인학 교, 한인교회는 하와이 대한 사람들의 가장 기초적 인 터전이 되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노동자들은 각 지역의 사 탕수수농장에 분산 배치되었다.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섬을 비롯하여 하와이섬, 마우이섬, 카우아 이섬 등 도처에 산재한 30여 곳의 사탕수수농장으 로 흩어져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 한 농장에 많게 는 500∼600명, 적게는 몇 십 명씩 고용되어 노동 을 하였다. 농장에는 인종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일본인 캠프, 중국인 캠프, 한국인 캠프로 구분되 었다. 하와이 한인 노동자들은 월급으로 미화 15달러 를 받으며 매일 10시간 노동을 하고 일요일에는 쉬 었다. 실제로 하와이의 농장에서 초기 한인 노동자 들은 한 달에 16달러를 받다가, 1905년 5월부터 2 달러가 인상되어 한 달에 18달러를 받았다. 1905년 경에는 한 달에 26일 정도 일을 하고 18달러의 임 금을 받았으며, 쌀과 야채, 고기, 빵과 버터 등 먹거 리를 구입하기 위해 한 달에 약 6~9달러가 소요되 었다. 하와이 한인의 통합단체, 대한인합성협회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조약으로 조국 의 명운(命運)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태인식은 국내나 하와이 한인사회나 마 찬가지였다. 정미조약 이후 하와이에서 조직된 대 표적인 단체로는 국민동맹회와 전흥협회를 들 수 있다. 국내에서 정미조약에 대해 하와이의 한인들 은 ‘정변’으로 표현하면서 이에 적극 대응하고자 했 다. 호놀룰루의 공진회와 와이파후에 있는 공동 회, 에와에 있는 친목회, 올라아에 있는 국민동맹회 가 합하여 ‘대한인합성협회(The United Korean Association)’가 조직되었다. 1907년 9월 2일 각 농장이 쉬는 날이기 때문에 각지의 한인들이 호놀룰루에서 모였다. 하와이의 24단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 회집하여 합동 발기대회를 열었다. 호놀룰루의 공진회, 와이파후 의 공동회, 에와의 친목회, 올라아의 국민동맹회가 하와이 한인들의 통합단체를 결성하기로 했다. 첫 모임에는 각 지방의 총대(總代)가 모두 모여 의논 했는데, 마우이섬 가일누(Kahului)의 의성회와 하 마쿠아포코(Hamakua Poko) 부흥회 총대도 참여 했다. 하와이의 여러 단체가 합하기로 하고 호놀룰 루에서 각 단체 주무원들과 임정수·김성권·이태수· 정원명 등이 회합을 가진 뒤 합동결의안을 통과시 켰다. 하와이에서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자, 북미 공립 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의 통합 문제가 떠오르게 되었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처단 하는 의거가 일어났다. 샌프란시스코 의거 이후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