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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⑩ 85 었음에랴? 전지(田地)를 팔아 약간의 자금을 마련한 석주는 1911년 1월 5일 가족을 남겨둔 채 먼저 서쪽으로 출 발하였다. 석주의 역사관 일기에는 나라를 잃은 자들이 산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 겪는 고난의 감성이 녹아 있으며, 먼저 와 있 던 혁명 동지들과의 반가운 만남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석주의 마음 속에 깊이 배어 있던 유구한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있었다. 그의 일기에는 계속하 여 숙신사, 부여사, 본국사, 고구려사, 신라사, 발해사 등의 역사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석주가 보여준 역사에 대한 깊은 인식을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음 미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초 사가(史家)의 견식이 없 어 망령되이 노예의 근성으로 꾸며 찬술하는 솜 씨를 남용하여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을 생각 지 않고 오직 타인을 숭배하는 데만 힘썼다. 역사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국가의 체통을 높이 고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지금 노예 사관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노예근 성을 길러 참담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은 본래 소견이 협소하여 압록강 이서에는 애당초 생각이 이르지 못하였 고 … 900년 문화대국을 느닷없이 일개 작은 선 괴(仙怪)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조종 이래의 피를 흘려 개척해 온 땅을 마치 다 18세기 중반 경 임청각의 모습. 고성 이씨 이종악 (1726~1773) 발간 문집 『허주유고』속에 임청각과 그 주 변 전경을 묘사한 그림이다(문화재청 제공). 『석주유고』 앞 부분. 이상룡의 아들 준형이 편집,  필사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