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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오산학교, 교육구국의 출발이었다 81 의하여 교육제도의 일 대 개혁이 이루어지면 서 새로운 국면을 맞 게 되었다. 이처럼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국정개혁에 있어서 무엇보다 시급 한 것이 교육을 통한 인재(人材)의 양성이었 다. 이로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1895년(고 종 32년) 2월에는 교육입국조서(詔書)를 반포하면서 학교의 설립을 서둘렀다. 그 해 4월에 한성사범학교 (漢城師範學校)를 설립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흥화학 교(興化學校) · 정신여학교 · 숭실학교 · 배화여학교 · 명신 학교 · 점진학교 등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탄생과 구국계몽운동 그런데, 1905년(고종 42년) 11월 17일 일본에 의 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외 교권이 박탈되고, 나라는 국제적 지위를 잃고 말았다. 이로써, 나라의 사정은 참으로 암울하였다. 이에 민족 지도자들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교육을 통해서 인 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무렵에 도산 (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매일 신보 주필 양기탁(梁起鐸)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단체의 필요성에 교감하였다. 이로 써, 이회영 · 전덕기 · 주진수(朱鎭洙) · 이갑 · 이승훈 · 안태 국 · 이동녕 · 이시영 · 신채호 · 류동열 · 김구 등이 참여하 여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했다. 이 때가 1907년(고종 44년) 4월이었다. 신민회는 ‘새로운 국민 · 새로운 민족’으로 다시 태 어 나자는 뜻의 신민의 꿈을 잉태하고 출발하였는데(안 천 지음, 『신흥무관학교』 중에서), 이 때 회원은 ‘믿을 사람’, ‘애국 헌신할 결의가 있는 사람’, ‘단결의 신의에 복종할 사람’에 한해서 자격이 인정되었다. 특히, 회 원의 입회절차는 대단히 엄격하였으며, 누가 회원인 지 비밀에 붙여졌다. 이 때, 양기탁이 총감독을, 이동녕이 총서기를 맡았 으며, 각도에 총감(摠監)을 두어 회원을 관리하였다. 또, 산하단체로 청년학우회를 두었는데, 윤치호가 중 앙위원장을, 최남선이 중앙총무를 맡았다. 신민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에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 때문이었다. 이승훈, 오산학교를 세우다 그리고,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항일 의 선두에 투쟁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이 때,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이 앞 자리에 있었다. 남강은 신민회가 창립되면서 추진한 1911년 ‘105인사건’으로 끌려가는 신민회 회원들(한국학중앙연 구원 제공) 안창호(1878~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