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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⑥ 79 조선인에 대한 특별 조직이었다. 재일조선노동총동 맹은 조직적으로 해체하고, 이후 전협 조선인위원회 의 지령 아래 산업별 재조직 투쟁을 계속했다. 1930 년 4월이 되면 도쿄조선노동조합 산하 대부분의 조 직과 조선노동조합은 해체되어 산업별조합으로 재 편성되었다. 이후 전협 산하의 산업별 조직에 다수 의 조선인이 들어갔다. 강평국의 노동운동 투신 다수의 재일제주인이 살고 있던 오사카 화학노동 조합의 경우, 김인학이 오사카에서 시코쿠(四國)지방 으로 1934년 초에 활동 기반을 옮겼다. 이와 연동하 여 김하철, 육복용, 성철성, 현호옥(제주인)의 4명은 오사카지구 조직을 구성하고, 고무, 비누공장 등에 대한 선전을 집중했다. 조선인 출신 인텔리가 다수 가담했던 반제동맹 조선인 조직과 달리 전협 산하의 노동조합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주도적으로 가담해 왔다. 특히 소규모의 공장이 산재해 있던 지역도 마 찬가지였다. 1933년 12월 화학노동조합 신(神)서부지구의 김 태권이 검거되자 정남수, 송춘화(제주인) 등은 고 무 공장쟁의 응원단을 통해 재건을 기도하였다. 1934 년 1월 이남수를 책임, 송정권을 서기, 송춘화를 부 녀부책, 정남수를 공대(工代)책임으로 화학 노동조합 신(神)서부지구를 재건했다. 이후 이 조직은 화학노 동조합 관서(關西)지방협의회 김인학의 지도 아래 활 발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일 여성제주인, 강평국은 조직 의 최말단에서 조직의 보존과 재건 과정에서 전력을 다했다. 또 여성으로서의 성별 차이에 기초하여 부 녀부를 주도하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훈처 연구원, 일본 와세다대 학 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 외국인연구원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과장, 성균관대 동아시 아학술원 연구교수, 한일민족문제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청암대학교 교수 · 재일 코리안연구소 소장, 재외한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식민지시 대 재일조선인운동 연구』, 『일본지역 독립운동사 연구』, 『강제연행사 연구』, 『재 일본조선인연맹 전체대회 연구』, 『오사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일상』, 『한국현 대사와 박물관』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인덕 ‘아가다 강평국 선생 추도비’(이윤옥 제공). ‘제주 3총사’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최정숙 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꽃바구니가 놓여있다.  제주 출신 천주교 신자이자 애국지사 강평국·고수선·최정숙 선 생 을 기리는 기념비가 2020년 5월 28일 황사평 성직자 묘역에 세 워졌다(제주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