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page

76 2023년 1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입학을 시 작으로 약 59명이 졸 업하였다. 식민지 치 하 조선에 서는 국내 에서 여성 을 위한 고 등교육 과 정이 막혀 있다는 점 도 유학의 길로 가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여성 유학의 꿈을 꾸게 된 데에 는 당시 소수이긴 하나 설립되어 있었던 여성교육기 관-진명여학교, 숭의여학교, 이화학당 등의 영향이 있었다. 이들 학교를 졸업하고 선후배가 수학하는 일본 학교에서 유학을 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의 학의 길을 당대 여성이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 며, 그 만큼 사명감과 선각자 의식을 필요로 하는 것 이기도 했다. 1927년 1월 유학생 50여명이 발기한 도쿄조선여 자청년동맹에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8월에는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조선총독부 폭압정 치 반대운동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28 년 1월에는 근우회(槿友會) 도쿄지회 창립대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한다. 그러나 의학공부와 항 일운동을 병행하던 그는 몸이 쇠약해져 학업을 중단 하고 귀국하였다. 고향에서 요양 중이던 1933년 1 월, 광주 여성독립운동인 ’백청단사건(白靑團事件)‘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광주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로 인해 늑막염 병세가 악화되어 1933년 11월, 34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② 강평국의 여성운동론 강평국이 1925년 『동아일보』에 6월 1일, 7월 20 일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여성해방의 잡감」 은 200 자 원고지 30매 정도이다. ‘잡감(雜感)’은 여러 형태의 잡다한 느낌을 말하며, 수필 형태이다. 이 글에서는 제목 아래 ‘별부재(別付在) 강평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존의 기록에는 강평국이 1926년에 앞의 도 쿄여자의전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따르면 최소한 1925년 6월 1일 즈음에서 7 월 20일을 전후로 하여 일본 규슈(九州) 오이타현(大 分縣) 벳푸시(別府市)에 머물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 을 통해 약탈혼, 여자를 매매하는 관습, 자유연애, 남 녀 동등권 사상 등에 대해 논했으며, 결국 결혼의 자 유, 연애의 자유, 혹은 사교의 자유 등 여성의 자유 독립에 관한 문제는 공상적 이론으로는 해결하지 못 강평국의 기고문이 실린 동아일보(1925.6.1.자, 4면)  강평국의 삶을 그려낸 창작극 ‘불꽃여인 강평국’  포스터(2021년 10월 제주문예회관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