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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조병세(趙秉世) 열사 57 ❺ 탐관오리를 징치하여 민심을 안정시 킬 것.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헛되어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강압으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 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林權助)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그 내용은 일본이 도쿄(東京)에 있는 외무 성을 통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 를 감리 · 지휘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 사는 외국의 한국신민을 보호하며, 한국에는 통감을 두어 서울에 주재하면서 한국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또 한국 의 각 개항장 및 기타 필요한 곳에 일본인 이 사관을 두도록 하여 대한제국은 자주적 외교 권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내정에서도 일 본인 통감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통탄할 상 황에 놓이게 되었다.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 올림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 늑결의 소 식을 듣고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내 세신 (世臣)으로서 따라죽음이 마땅하다”는 비장 한 각오로 신병을 무릅쓴 채 상경하여 고종 에게 을사5적 처단과 조약이 무효임을 각국 에 밝힐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계속 해서 민영환, 이상설 등 백관을 이끌고 입궐, 소수(疎首)로 연명 상소하였다. 조약에 참여 한 박제순을 참형에 처하고 각 대신을 파면 한 후 다시 능력있는 신하를 외부대신에 임명 하여 각국 공사들과의 담판을 통해 협약을 파 기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에 눌린 고종의 비답 은 미온적일 뿐이 었다. 그는 이튿날에도 다시 대신들을 이 끌고 의분에 찬 상 소를 올리는 한편, 일본공사 하야시 (林權助)에게 군대 를 동원하여 강제 로 조약을 체결한 사실의 부당성을 꾸짖고, 조약의 폐 기를 요구하였다. 1905년 11월 26일 전 의정(議政) 조병세가 일본공사관에 보낸 을사늑약 반 대 서신(왼쪽, 국가보훈부 제공) 조병세 등의 을사늑약(한일의정서) 비난에 대 한 일본 공사관측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