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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조병세(趙秉世) 열사 55 언론계통의 직책이다. 철종이 승하한 뒤 고종이 등극 하고 대원군이 집권하는 정권교체 기에도 그는 여전히 사헌부의 장 령, 집의, 부교리, 사간원 사감, 집 의, 응교, 홍문관 부응교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65년(고종 2년)부터는 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우부승지에 오 르는 등 권력의 중심부에서 활동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대원군의 섭정이 강화되 면서 이천부사, 영광군수 등 외직으로 물러나 중앙관계에서 멀어졌다. 지방의 수령으로 재 직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부정부패를 없 애고 서민들의 생활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 작되면서 다시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여 애민 위국(愛民爲國)의 큰 뜻을 펴게 되었다. 1876년 개국 당시 그는 50세로서 병조 참 의(參議)로 있었으며, 이듬해 공조참판, 지춘추 관사를 역임하였고, 성균관 대사성과 동지경 연사(임금에게 학문과 경세의 도를 강의하는 직책)를 맡아 고종의 측근에서 활동하였다.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적 국권 수호에 노력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 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1894 년 갑오개혁이 실시되기까지의 10여 년간 조 병세는 이조·예조·공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며 강화되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적 국권수호에 힘 썼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권력은 민영준(閔泳 駿), 민영소(閔泳韶), 민영달(閔泳達) 등 민씨 척족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 권신들이 자행한 매관매직과 가렴주구의 영향은 삼정 (三政)의 문란을 더욱 촉진하여 민중들의 생 활은 궁핍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 이지 않았다. 이에 이러한 척신(戚臣)들의 폐 단으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어려움을 지 적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기인론(其人論)을 주장하여 인재선발과정의 공정성 확보를 위 해 힘썼다. 1894년 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운동으 로 폭발하자 대책마련을 위한 어전회의에서 대경장(大更張)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청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현등사 입구)에 있는 삼충단비(국가보훈부 제공). 조병 세 · 민영환 · 최익현 세 열사의 충절을 기념하는 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