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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남궁억(南宮檍) 선생 53 ‘십자가당’ 사건으로 구금돼 고초 겪어 ‘무궁화사건’으로 감시가 한층 삼 엄해진 가운데, 홍천지역에서 춘천 선교부의 ‘십자가당사건’이 일어났 다. 홍천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던 교 사 김복동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 써 비밀결사인 십자가당이 발각되 었다. 십자가당(‘크레스트당’)은 1933년 4월 강원 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일원의 감리교계 목 사와 신자들이 ‘공존공향(共存共享)의 지상 천국’을 건설하고자 기독교사회주의 이념으 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1933년 4월 19일 부터 23일까지 춘천교회 허문리예배당에서 제3차 동부연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기간 중 연회 회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아래층 춘천 여자관에서 연회와 별도의 비밀 회합이 이루 어졌다. 목회자로는 인제구역 담임 남천우(南 天祐) 목사와 홍천서구역 담임 유자훈(劉子 勳) 전도사, 가평서구역 담임 이윤석(李胤錫) 전도사 등과 평신도 대표로 연회에 참석했던 창촌교회 어인손, 모곡교회 김복동, 후동교회 남궁식 등이 항일 비밀결사 ‘십자가당’을 조 직했다. 조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신규 회원을 늘려가는 단계에서 평 소 모곡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분위기를 예의 주시하던 홍천주재소 순사들이 이 사건 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때 남궁억은 홍천지역 독립운동의 실체를 파악한 일제 당국에 의해 십자가당 당원 전원과 함께 붙잡혀서 조사 를 받았다. 일제 경찰에게 혹독한 조사를 받 고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16명은 면소(免訴) 되었고, 1933년 12월 14일에 12명만 서울로 송치되어 조선총독부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 다. 그 결과 남궁억은 1934년 8월 3일 유자 훈, 남천우, 김복동 등과 함께 공판에 회부되 었다. 남궁억은 붙잡힌 후에 조금도 굴복함 없이 당당하게 대처하였다. 1년 6개월간 옥고를 겪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잠시 서울에 머 물다 보리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보리울에서 다시 교회일에 힘쓰며 모곡교회의 새로운 진 흥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 아 옥중에서의 고초로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 어 1939년 4월 5일 오전 몇 마디 유언을 남 기고 향년 77세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 남궁억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신문 기사 「남궁억씨 자택에서 영면」